가을산의 계절이다. 1,000만명이나 된다는 산 인구의 계절. 어머니의 품과 같이 육덕(肉德)이 깊어 그 성질을 바위산에 대비해 육산(肉山)이라고 말해지는 지리산. 해서 지리산을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걷기 열풍에 둘레길 탐방 열풍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지리산 둘레와 능선을 밟고 있겠다. 수십 년씩 지리산 타는 도사들부터 첫 걸음을 놓는 왕초보들까지. 모두들 산맥을 따라 단풍 못지않게 컬러풀한 비싼 값을 치뤘을 등산복장을 뽐내며 물들고 있겠다. 그들은 지리산의 단풍 중 어떤 색 물을 들이고 있을까. 어떤 색 물을 들여 도시로 복귀하고 또 자신의 하나뿐인 영혼의 목숨에게로 귀환하는 것일까.
작년 이맘때 지리산의 제일 깊다는 한 골짝을 처음 타봤다. 30년도 더 전 여고 친구와 둘이 장사형의 섬진강 길을 걸어 쌍계사 칠불암까지만 올라보는 산행이 아닌 여행을 한 적이 있은 후 지리산 언저리는 처음이었다. 들뜸도 흥분도 없었다. 도대체 지리산이 뭐길래, 지리산이 어떻길래 하는 마음이었다. 나도 남 못지않게 산을 좋아한다. 산행의 이력은 보잘것없지만 사는 곳이 북한산 칼바위 능선과 잇닿는 동네라 3, 4년 북한산행을 부지런히 하며 산맛을 알았다. 옆 아파트에 산행을 즐기는 소설가 선생님이 계셔 그 덕분으로 같이 산행을 자주 했다.
네 명의 산행 모임이 우연찮게 꾸려지고 신나게 정말 충실하고 재미있게 일주일에 한번씩 하루 종일 빡세게 하던 6, 7개월여의 산행. 그 진진했던 산행이 퍽 깨졌다. 깨질 때에는 좋은 일로 깨지지는 않는 것일 테니 나쁜 일이 벌어진 것인데 그 전말을 여기에 쓸 일은 아니다. 그 산행 기간 중 지리산 산행에 대한 계획이 두 번 있었는데 무산됐던 일이 있다. 지리산 얘기는 모임의 리더가 지리산을 수십 년 다닌 도사이기에 우리의 요청이 아니더라도 지리산을 보여주고 싶어했을 거고 당연 우리도 도사의 안내를 받아 가고 싶어 했다. 그들 중 나이가 어린 내가 기차편 예약을 맡아서 예약했다 취소하고 다시 변경하고 다시 취소한 적이 있다. 일박으로 했다가 이박으로 했다가 무박으로 했다가 하며 결국 두 번 계획했던 지리산행은 성사되지 않았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그렇게 세상을 잘 아는 한 성현이 거기 있어서 산행이 파토 난 그 날로 4년이 흐르고 네 사람은 한 번도 같이 하지 않았다. 그 성현은 그때의 리더와 지금까지 산행을 같이한다고 한다. 좋은 시작은 사람이 하고, 나쁜 끝은 구둣발에 퉁기는 돌멩이가 하거나 공중에 날아다니는 검은 비닐봉지가 하는가 보았다. 아니면 신(神)이?
작년 처음으로 지리산에 서며, 세석평전을 거치고 천왕봉, 반야봉, 첩첩 물드는 능선을 건너다보며 훌륭하구나 아름답구나 하는 소리를 속으로 듣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밋밋한 산문의 소리, 약동하는 춤, 생생한 시의 소리가 아니었다. 지리산이 아름답기로, 또 훌륭하기로 사람이 한때 품었던 희망과 선의와 진의, 순하게 겹쳤던 마음의 순결한 때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그런 것들보다 높고 훌륭할 수 있을까. 지리산, 아니 무슨 명산이라도 거기에 사람이 없다면 어찌 지리산이 되고 무슨무슨 명산이 되겠는가. 우리가 올라야 할 명산은 서로의 환희심이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다는 걸 잊어먹지 말아야겠다. 지리산에 난생 처음 서서 감동이다 아름답다 환호하지 않고 칭찬의 말 아껴 미안하다. 그렇지만 지리산은 자신이 지리산이 되든 리지산이 되든 관심 두지 않을 것이다. 영원을 굴리는 제 할 일이 바쁘고 많아서 이 계절의 할 일 단풍 들이는 일만 열심히 집중할 뿐이겠다.
이진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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