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참여재판을 배경으로 한 영화 '의뢰인'이 전국 150만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 중인 가운데, 현실에서 영화와 비슷한 재판이 진행됐다. 영화와 현실 사건 모두 살인 혐의가 모호한 피고인을 두고 벌어진 국민참여재판이었으며, 검찰이 제시한 증거가 피고인의 유죄를 인정할 만큼 증명력을 가졌는지가 재판의 핵심 쟁점이었다.
사건은 지난해 2월21일 오전 8시 경남 함안군의 시골 마을에서 벌어졌다. 119 사이렌 소리가 마을을 뒤흔들었고, 주민들은 그 소리를 따라 방앗간으로 모여들었다. 범행 현장에는 둔기로 얼굴을 맞아 사망한 방앗간 주인 박모(75)씨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영화 '의뢰인'에서와 마찬가지로 경찰은 이 사건에서 범행을 목격한 사람도, 결정적 증거도 찾아내지 못했다. 난감해하던 경찰에 해결의 실마리를 준 것은 마을 주민들이었다. 주민들은 방앗간 근처에 살던 김모(33)씨가 평소 방앗간 일을 도와주고 밥을 얻어 먹는 등 박씨와 친분이 두터웠다고 진술했다. 또 김씨가 평소 주민들에게 돈을 빌리고 잘 갚지 않는 것은 물론 술을 마시면 폭력적인 모습도 간혹 보였다고 말했다.
사건을 지휘한 검찰은 김씨가 금전적 원한관계로 박씨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우선 김씨 운동화를 임의 제출 받아 정밀 분석했다. 혹시나 했던 검찰은 김씨 왼쪽 운동화 옆 부분과 오른쪽 운동화 바닥에서 박씨의 혈흔을 발견했고,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특히 검찰은 발견된 혈흔이 4mm 크기의 원형이라는 사실에 집중했다. 법의학적으로 원형의 혈흔은 상처에서 튀는 피가 접촉면에 부딪힐 때 형성된다고 한다. 검찰은 운동화의 혈흔이 범행 과정에서 묻은 것일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만약 이 혈흔이 살해 이후 현장에 남은 피가 튄 것이라면, 원형의 크기가 적어도 1.2㎝는 돼야 한다는 감정결과도 나왔다. 결국 검찰은 이 혈흔을 결정적 증거로 김씨를 구속 기소했다.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1심에서 김씨는 "정확히 어디서 피가 묻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며 "사이렌 소리를 듣고 현장에 가 호기심에 박 할머니의 시신을 덮은 부직포를 들어봤는데 그 때 피가 묻은 것 같다"고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검찰은 "당시 현장에 있던 주민들과 구급대원들이 김씨를 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고 김씨 주장을 반박했다. 재판은 3일간 숨가쁘게 진행됐지만, 결과는 의외로 명료했다. 배심원 9명이 전원 일치로 무죄 의견을 재판부에 제출했고, 재판부도 이를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유죄를 의심할 정황이 여럿 있지만, 김씨가 범인이라 확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배심원과 재판부는 박씨의 옷과 집안에서 사건 전 묻은 것으로 추정되는 혈흔이 발견된 점을 고려, 다른 이유로 김씨 운동화에 혈흔이 묻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 또 마을 주민 대부분이 방앗간을 사용했고, 박씨 집이 국도 변에 있어 제3자에 의한 범행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도 감안했다.
항소심 재판부와 대법원의 판단도 다르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공소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부족하므로 원심의 무죄 판단은 정당하다"며 검사의 항소를 기각했다. 대법원 1부(주심 안대희 대법관)도 10일 김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 사건을 수사했던 당시 창원지검 배문기 검사는 사건발생 몇 개월 뒤 쓴 글에서 "증거를 하나하나 수집ㆍ분석하였고, 누가 범인인지 사건 실체에 대한 확신이 생기면서 마음의 부담을 덜었다"고 했다. 하지만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무죄가 확정됨에 따라 이 사건 범인의 실체는 오리무중에 빠지게 됐다.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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