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라….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난 사실 아버지가 어떤 존재인지 잘 몰라. 나도 자식 가진 아비인데도 말야. 나더러 한국인의 아버지상이다, 흔히들 그렇게 말하잖아. 그럴 때마다 스스로 의문이 들지. 내가 한국인의 아버지다운 모습으로 과연 무얼 만들었을까, 사람들이 아버지라는 존재에게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내겐 아버지라는 말은 여전히 어색하고 멀거든. 날 낳아주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러본 게 두 번 정도 되려나. 그것도 어릴 때여서 기억이 잘 안 나.
그래서 인터뷰 기다리다 좀 적어 봤어. 아버지란 어떤 존재일까 하고 말야. 이를테면 이런 거겠지. 읽어볼게. 하나, 아버지는 도덕이나 문화의 상징이며 또 구현자이어야 한다. 둘, 아버지는 남의 아픔을 만져줄 줄 아는 인간미가 있어야 한다. 셋, 아버지는 세속적 욕망을 정화시키게끔 만드는 존재여야 한다…. 응, 너무 관념적이라고? 그렇겠구먼. 하지만 내게 있어서 아버지란 그렇게 이상화된 존재일 수밖에 없어. 감정적으로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말야.
우리 아버지(최철)는 해방 이전까지 중국에 계셨대. 날 낳으시자마자 임시정부에서 일하던 작은아버지를 찾아 상하이로 가셨다는구만. 해방 뒤엔 인천에서 신문사랑 영화사를 운영하셨는데 어린 나는 서울에 있는 외가로 보내셨지. 가끔 인천에 가서 뵙긴 했지만 대화라고 해봐야 “아버지, 진지 잡수세요” 뭐 이런 게 전부였지. 아버지는 너무 바쁘셨고 하시는 일은 내가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었어. 윤전기 돌아가는 소리로 시끄럽던 아버지 사무실에 신카나리아, 복혜숙 같은 당대의 스타들이 드나들던 모습이 아렴풋이 생각나.
그리곤 여덟 살 때였지. 아버지의 영정을 들었을 때 내 나이가 말야. 손수 기획하고 제작하신 ‘수우’라는 영화가 개봉하기 직전이었어. 아버지 사진을 끌어안고 시사회에 갔던 기억이 나. 어두운 극장 실내 곳곳에서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아. 남들 못지않게 정이 많은 분이셨다는데… 미제 과자를 사다 주시던 기억이 나. 초등학교 입학식 날 나를 못 찾으셔서 우왕좌왕하시던 모습도. 하지만 육친의 정으로 아버지를 기억하기엔 함께한 시간이 너무 짧았지.
그래서 내 연기에 묻어 나온 아버지는,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는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하는 바람에 가까울 거야. 근데 그 모습에서 한국 아버지의 전형을 읽어내잖아? 아마 그건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 갖는 바람이 다르지 않다는 뜻일 거야. 고리타분하네 보수적이네 비판을 하면서도, 결국 사람들이 ‘전원일기’ 김회장 같은 아버지의 존재를 원하고 있다는 거지. 난 그렇게 해석하고 싶어.
처음엔 조금 두렵기도 했어. 아직 젊은 배우의 연기를 보고 거창하게 한국인의 아버지 어쩌고 하니까. 사실 연기로 치면 나는 월반한 셈이거든. 나보다 열 살 정도 높은 선배들이 해야 할 역할인데, 6ㆍ25 전쟁 통에 한 15년 정도 연기자가 배출되지 못했어. 김승호, 최남현 같은 선배들 다음에 중년 역할을 할 연기자가 없었거든. 그래서 연극하다 TV로 넘어오자마자 나한테 아버지 역할이 떨어지더라고. 아직 서른도 채 안 된 나이인데 말이지.
아버지 역할을 한 첫 작품은 KBS ‘실화극장’이었어. 1966년 아니면 67년이었을 거야. 내가 최무룡 선배 형으로 나왔지. 선배가 열 두살이나 위였는데. 어쨌든 역할을 맡았으니 제대로 해야지 않겠어? 근데 아버지라는 존재가 좀체 감이 오지 않는 거야. 고민하고 있는데 선배들이 그러시더라고. 리포팅을 해보라고. 역할의 어투라든가 신체적 조건, 살아온 과정 등을 분석하는 걸 그땐 리포팅이라고 했어. 꼼꼼하게 분석하면 책 한 권 분량이 나오곤 했지.
한국인의 아버지의 표상이라는 ‘전원일기’의 김회장도 그런 리포팅 결과야. 4대가 모여 사는 집안의 가장은 어떤 심리일까, 전형적인 60대 농민의 표정은 어떤 것일까 나름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구했지. 물론 대본은 작가가 쓰지만 인물의 디테일한 면을 표현하는 건 결국 배우의 몫이거든. 그 고민의 결과물인 연기에 대해 처음엔 비판도 많았어. 너무 힘이 없어 보인다고. 근데 80년대 초에 내가 바라본 농촌 가장의 모습은 그랬어. 급속도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부권이 상실돼가던 시기였거든.
그 시절에 노모를 모시면서 자식들을 큰 가슴으로 품어 안아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강압적으로 다스려지지도, 다스릴 방법도 없었던 거지. 자기 고집을 부리기보다 자식들이 언젠가 자신의 진심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존재가 김회장이지. 최불암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 한, ‘파~’ 하고 속으로 터뜨리는 웃음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거야. 옆에 나이든 어머니가 계시고 자식들이 있는데 격하게 감정을 드러낼 수가 없는 거지. 너무 약하고 보수적이라고 말도 많았지만, 시간 지나고 나선 한국인의 아버지라고 인식되더라고. 연기자로서 보람이라면 보람이지.
하지만 내가 그려낸 김회장이 나약한 존재만은 아냐. 진부하게 들리겠지만, 난 이어령 교수의 표현대로 세상이 다 수평적 사회로 변하더라도 가족만큼은 수직 사회로 남아 있었으면 좋겠어. ‘전원일기’도 꼼꼼히 뜯어보면 결국은 김회장의 존재가 가족 공동체를 끌어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말야. 아버지의 존재가 무너지면 가족뿐 아니라 결국 사회가 모두 무너진다고 생각해. 우리 집엔 아내도 앉지 못하는 나만의 공간이 있어. 쓸데없는 고집 같지만, 난 아버지의 자리라는 걸 그렇게 상징적으로나마 지켜줬으면 해.
그런데 이렇게도 얘기할 수 있어. 내가 ‘전원일기’의 아버지를 만들어냈지만, ‘전원일기’의 아버지로부터 또 배웠다고. 이게 말이 되는지 몰라. 내 나이에 맞지 않는 아버지 캐릭터를 만드느라 고민했지만, 그 과정에서 인간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게 된 것 같아. 때로는 드라마 속의 최불암이 현실의 최불암에게 ‘아이구, 이 놈이 이렇게 철이 없구나’ 하고 타이르는 것 같았지.
지금 김회장을 연기한다면? 글쎄… 아마 더 깊숙하게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힘은 더 없어 보이더라도 말야. 96년이었을 거야. 장민호 선생님의 연극을 본 적이 있는데 참 맥 없이 하시더라고. 그래서 끝나고 내가 여쭤봤지. 이 부분에선 좀 올려주셔야 하지 않으셨습니까, 하고. 장 선생님이 그때 그러셨어. 연기가 올린다고만 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낮아져야 한다, 너도 내 나이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라고. 그런 말씀도 하시더군. 표현하려고 해서 표현되는 게 아니다, 나이가 가르치는 거다.
이젠 조금 알 것 같아. 심연의 연기라는 거, 그건 희로애락의 경계를 넘어선 영역에서 피어나는 일이겠지. 아버지의 역할이라는 것도 마찬가지 아닐까. 권위나 도덕을 내세운다고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는 게 아닐 게야. 말을 하고 싶지만 참아버리는 것, 그래서 당장은 반응이 없더라도 언젠가는 깊은 뜻을 전해주는 게 아버지의 몫 아닐까. 거룩하지만 힘든 역할이야.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 늙은 아버지 연기를 한다면? 글쎄. 아버지라는 건 정말 힘든 역할이다, 이렇게 대답을 얼버무려야지 뭐.
정리=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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