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5대 국새가 공개될 당시 세간의 관심은 인문(글씨 부분)보다는 인뉴(손잡이 부분)에 쏠렸다. 4대 국새 제작단장이던 민홍규 씨가 금 1.2㎏을 횡령한 부분이 인뉴인데다, 국새의 위용과 화려함을 뽐낼 수 있는 부분이 인뉴이기 때문이었다.
5대 국새 인뉴 부분 제작자는 전통금속 공예가 한상대(50)씨. 5대 국새 디자인공모에서 인간문화재, 대학교수, 유명작가 등 20여명을 실력으로 제친 새 국새 장인의 이력은 언뜻 보면 초라할 정도다. 인간문화재나 장인도 아니고, 대학 교편을 잡고 있지도 않다. 전북 원광대 금속공예과를 졸업하고, 남대문시장 보석세공 일을 시작으로 '바닥'부터 굴러온 이력은 더욱 눈에 띈다. 그에게 국새 제작은 경력을 중시하는 현장에선 이론을 무시하고, 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대학 등에서는 경력을 업신 여기는 정서 속에 '주변인'으로 지내온 설움을 한 방에 날린 홈런이었다.
전북 익산에서 1991년 대학을 졸업한 한씨는 모 인간문화재 문하생으로 들어갈 꿈을 안고 상경했다. 그러나 학맥이 우선시되던 당시 분위기에 지방대 출신 한씨에게 꿈의 실현은 쉽지 않았다. "성공하리라 독하게 마음먹고 무작정 남대문시장에서 보석세공 일을 시작했습니다. 한 달 하숙비가 35만원이었는데, 월급이 40만원이었습니다. 하숙비 밀렸다고 자다가 여러 번 방에서 쫓겨나기도 했죠."
직장에서는 따돌림을 당할 때도 있었다. '대졸자가 여기 와서 뭐하냐'는 선임자들의 시선이었다. 이유 없이 맞기도 했다. 그렇게 10년을 넘게 남대문시장과 북창동 등을 전전하며 보석가공과 세공, 옥공예 등 닥치는 대로 일을 배웠다.
밑바닥부터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한 그의 10년 경력은 이후 10년 경력을 쌓는데 밑거름이 됐다. 2003년 영등포구청 인근에 자신만의 작업실을 열면서 각 방송사에서 사극에 쓰는 비녀 등의 장신구 소품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옥공예와 세공 등 여러 기술이 동시에 필요한 사극 소품 제작에 그의 능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협찬이다 보니 돈은 크게 못 벌었어요. 경력을 쌓는 것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가 소품을 제작한 사극만 해도 '주몽' '선덕여왕' '이산' 등 거의 십여 편에 이른다. 또 그 동안 각종 공모전에서 20여 차례 수상하고, 기능경기대회 심사장과 심사위원 등으로 활동하는 등 생활의 안정도 찾았다.
그런 그에게 지난해 말 5대 국새 디자인을 공모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실 공모 소식이 나오기 전부터 미리 디자인을 준비했습니다. 그 만큼 한번 해보자는 의지가 강했던 거죠. 올해 초까지 석 달간은 작업실에서 먹고 자며, 오로지 국새에만 매달렸습니다."
국새 디자인에서 그가 가장 신경 쓴 부분은 화려함과 실제 주물기술의 조화였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막상 주물로 만들어내지 못하면 그림의 떡이기 때문이다. "제 국새 디자인은 두 봉황이 서로 마주보는 모습인데, 이 마주보는 각도와 봉황의 날개주름을 몇 개로 해야 하는지 조차 하나하나 고민했습니다. 그것도 종이나 컴퓨터에 디자인 한 게 아니라 실제 만들어 직접 비교하다 보니 오래 걸렸죠. 실제 만들어본 연습 작품만 수백 개는 될 겁니다."
그는 인간문화재에 선정되면서 동시에 대학강단에 서는 게 목표다.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진정한 장인으로 거듭나고 싶다는 거다. 현재 바쁜 작업시간에도 대학원에 진학해 이론 실력도 쌓고 있다. 내년 가을 개인전을 열기 위해 요즘도 매일 새벽까지 작업을 하고 있다는 그는 "정말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묵묵히 한 길만 걸어온 게 좋은 결과를 낳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태무기자 abcdef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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