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여름 기아자동차는 국내 신경과학 분야 권위자인 정재승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에게 특별 프로젝트를 의뢰했다. 2005년부터 개발해 온 야심작 VG(프로젝트 이름)의 차 이름을 지어달라는 것. 정 교수팀은 국내외 200여명을 대상으로 심층연구를 진행했다. 연구팀은 1년 넘게 단어 연상, 시선 추적,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fMRI) 측정 등 다양한 방식으로 뇌 반응을 추적했고, 그렇게 해서 얻은 결론이'K7'이었다. K는 기아(KIA), 한국(KOREA)을 떠올리면서 '지배, 강함'을 뜻하는 그리스어 '크라토스(kratos)'의 첫 글자이다. 7은 행운을 상징한다.
기아차는 K7에 이어 내놓은 K5도 연속 히트시켰다. 이제 'K'라는 통합 브랜드로 세계 시장을 공략할 방침이다. 기아차 관계자는 "네이밍에 알파벳과 숫자를 결합한 알파뉴메릭(Alphanumeric)방식을 채택했다"며 "최고의 짝을 찾기 위해 업계 최초로 뉴로마케팅(NeuroMarketingㆍ무의식적 뇌 반응을 마케팅에 활용하는 것)방법까지 동원했다"고 전했다.
해마다 수 백 가지 이상의 새 차가 쏟아져 나오는 요즘, 편하고 기름 덜 먹고 잘 나가는 차를 만드는 일 못지 않게 공들여야 하는 것이 바로 차의 네이밍 작업이다.
사실 지난 수 십 년간 자동차 회사들은 도시 이름, 음악 용어, 꽃 이름, 형용사 등 이해하기 쉬운 단어로 차 이름을 지어 왔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는 기아차 'K'시리즈처럼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으로 신차의 이름을 지어주는 알파뉴메릭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BMW 545Ci, 메르세데스 벤츠 SLK200, 렉서스 LX450, 푸조 206CC 등 알듯 말듯한 이름이 무수히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는 까닭이 있다. 우선 해외 수출이 많아질수록 어느 지역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이름도 다른 곳에서는 나쁜 이미지를 주거나 엉뚱한 뜻으로 오해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1970년 대 '쉐비 노바(Chevy Nova)'를 내놓았다. 영어로 신성(新星)을 뜻하는 '노바(NOVA)'라는 단어를 활용한 것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중남미에서는 거의 팔리지 않았다. 노바라는 단어가 스페인어로는 '가지 않는다(Don't go)'라는 뜻을 담고 있었는 데 GM은 이를 미처 파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각 나라마다 상표 등록, 관리, 분쟁 등 복잡한 절차도 풀어야 한다. 업계 관계자는 "자동차 이름의 상표 등록권은 자동차는 물론 자동차 부품 회사 등 모든 분야가 묶여 있다"며 "전 세계에서 안 겹치는 단어를 찾기란 하늘에 별 따기이기 때문에 밋밋하지만 위험이 덜 한 알파뉴메릭을 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알파뉴메릭을 활용한 일관된 통합 브랜드는 회사와 제품 이미지를 널리 알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박용석 아이코닉브랜드 대표는 "소비자 입장에서 차를 산다는 것은 그 브랜드를 내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라며 "자동차는 휴대폰이나 TV 등 다른 제품보다도 소유의 개념이 강해 브랜드 이미지의 영향력이 크다"고 설명했다. 1994년 독일 아우디(Audi)는 신형 대형세단을 내놓으면서 차 이름을 A시리즈로 통일했다. '아우디 80'은 A4로, '아우디 100'은 A6로, V8로 부르던 차는 A8로 바꿨고, 럭셔리카라는 이미지를 굳히면서 큰 성공을 거뒀다.
물론 알파뉴메릭이라고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26개 알파벳 중 다른 철자보다 눈길을 끄는 철자는 S, Z, X, M 등 몇 개에 불과하다.
자동차 회사들끼리 다툼도 잦아지고 있다. 1989년부터 세단에 Q45라는 이름을 썼던 인피니티는 2005년 아우디가 새 SUV에 Q7이라는 이름을 붙이자 소송을 제기했다. 일본 혼다는 미국 포드 계열의 링컨의 SUV가 MKX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자 아큐라(Acura)의 SUV 'MDX'와 헷갈릴 수 있다며 소송을 냈다. 세 자릿수로 차 이름을 정하기로 유명한 포르쉐는 '901'이라는 이름을 쓰려다 푸조가 가운데 0이 들어간 이름을 먼저 등록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911'로 바꿨다.
이름 짓는 일 자체도 갈수록 복잡해지고 있다. '오피러스' '스포티지' 처럼 사내 공모, 인터넷 공모를 통해 이름을 정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대부분 외부 전문기관에 의뢰해 30개 가까운 후보를 정한 뒤 전문가의 심층 검증을 거친다.
때문에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처럼 옛 이름을 계속 쓰는 경우도 많다. 최근 국내에 출시한 GM 쉐보레의 중형차 '말리부'는 1964년 이후 47년째 같은 이름을 쓰고 있고, 미국 크라이슬러도 1955년 첫 생산 때 대형 세단 300을 내놓은 이후 지금까지 300B, 300C처럼 300을 그대로 가져가고 있다. 기아차 관계자는 "신선함은 떨어지지만 새 이름 짓는 것보다 그 동안 쌓아온 브랜드 가치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적은 비용으로 큰 홍보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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