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물, 땅의 이치에 따라 기업과 인간의 흥망이 영향을 받는다는 풍수지리. 한낱 미신에 불과할 수도 있다. 더구나 과학적인 금융 기법으로 무장한 금융권과는 영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금융권만큼 풍수지리에 집착하는 곳도 많지 않다. 돈을 다루는 곳이기에 세세한 부분까지 더욱 신경을 쏟지 않을 수 없는 모양이다. 물론 드러내놓고 따지지는 않지만 행여 잘못된 터 때문에 화를 입지는 않을지, 자칫 명당 자리를 놓치는 것은 아닐지 전전긍긍하는 경우가 많다. 풍수지리에 집착하는 금융권의 숨은 얘기들을 살펴본다.
풍수지리에 얽힌 은행 흥망사
지금은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외환위기 이전 5대 시중은행이었던 조흥ㆍ상업ㆍ제일ㆍ한일ㆍ서울은행에는 풍수와 얽힌 일화들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지금은 한국은행이 소공동별관으로 사용하고 잇는 옛 상업은행 본점이다. 이철희ㆍ장영자 어음사기사건(1982년), 명동 지점장 자살 사건(92년) 한양 경영위기 사태(93년) 등 크고 작은 악재들이 잇따르자 94년 한 직원이 풍수지리 대가인 지관을 찾아갔다. 그 지관이 내린 결론은 본점의 터가 좋지 않다는 것. 소공로와 남대문로 그리고 남산 3호 터널길이 마주치는 꼭지점에 삼각형 모양으로 들어선 탓에 3호 터널에서 나오는 살기(殺氣)를 본점 건물이 온 몸으로 떠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을 전해 들은 당시 정지태 행장은 3호 터널 쪽을 바라보고 있던 행장실 집기를 모두 북쪽 시청 방향으로 돌려 놓았고, 나쁜 기운을 빼내야 한다는 이유로 한때 폐쇄했던 한국은행쪽 남문을 다시 열었다. 당시 상업은행이 풍수에 따라 은행장 집기를 옮겼다는 사실은 언론에 가십거리로 등장했을 정도. 공교롭게도 남문을 열자 그쪽 방향에 있던 한국은행이 부산지점 헌돈 불법 유출사건(95년), 구미사무소 현금 사기사건(96년) 등 잇단 악재에 시달려야 했다.
옛 제일은행의 본점이 위치한 서울 종로구 공평동 100번지는 조선시대 서슬 퍼렇던 사정기관인 의금부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환란 직전 은행장 3명이 연달아 불명예 퇴진을 한 데다 한보 사건에 연루되면서, "이 곳에서 고문 등으로 생명을 잃은 원혼들 때문에 좋지 않은 일들이 줄을 잇는다"는 설이 파다했다. 결국 제일은행은 환란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뉴브리지캐피탈에 매각된 데 이어 지금은 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 매각돼 SC제일은행으로 탈바꿈했다.
롯데백화점 본점 맞은 편에 있는 옛 서울은행 본점(현 이비스호텔)도 금융회사로서는 터가 좋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기는 마찬가지다. 가뜩이나 복이 없는 터인 데다 그나마 있는 복도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있는 KB금융쪽으로 흘러 간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광교 사거리에 있는 옛 조흥은행 본점과 롯데백화점 에비뉴엘로 거듭난 한일은행 본점은 건물 외관이 칙칙한 검은 색이어서 나쁜 기운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풍수에 집착하는 금융회사들
금융사 중 최고의 명당으로는 남대문 옆의 신한은행 본점이 꼽힌다. 인왕산과 남산 등에서 나오는 좋은 기운을 모두 받아 재운(財運)이 넘친다는 것. 구한말 화폐를 찍어내는 전환국 자리였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2004년 신한금융이 조흥은행을 인수한 뒤 본점 이전을 검토했다가 결국 비좁은 현 사옥을 유지하기로 한 것도 풍수의 영향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신한은행 본점 바로 옆의 삼성생명 사옥도 명당의 범주에 포함된다. 삼성그룹이 금융 계열사를 이곳에 집중시키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관측이다.
서울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 역시 괜찮은 터로 꼽힌다. 이 자리는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문익공 정광필의 집터로, 이 집안에서만 12명의 정승이 배출됐다. 특히 우리은행은 당초 이 사옥을 매각하려고 했으나 워낙 가격이 높아 원매자가 없는데다 굴착 때 금빛 흙이 나오면서 명당이라는 소문이 돌아 본점 사옥으로 그냥 사용키로 했다는 후문이다.
하루에도 수십 조원의 돈을 다루는 증권사들은 풍수에 더욱 민감하다. 특히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은 '풍수 경영'을 중시하기로 유명하다. 2000년 서울 강남에서 사옥을 마련할 때 지관과 함께 다녔다. 당시 "구릉지인 역삼역 주변에서 테헤란로를 따라 내려온 재물이 모이는 삼성역 사거리가 강남에서는 가장 명당"이라는 지관의 얘기를 듣고 근처 빌딩을 매입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얘기다. 최근 을지로 센터원빌딩을 새로운 사옥으로 정한 것도 조선지대 동전을 만들었던 주전소(鑄錢所) 터였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증권회사 본사는 대부분 서울 여의도에 몰려 있지만, 삼성증권은 종로를 고집하는데도 이유가 있다. "여의도는 강바람이 심해 웬만큼 기가 세지 않으면 버티기 힘들다"는 것이다. 한때 삼성증권 본사로 사용됐던 종로타워는 주변?사기(邪氣)를 막기 위해 본사 뒤에 탑을 하나 세워두고 있기도 하다. 신라호텔이 정문 안쪽에 돌탑을 세워놓고, 한남동 삼성리움미술관이 정문 바닥에 동판을 설치하는 등 유독 삼성 계열사들이 풍수에 민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밖에 우리투자증권은 여의도공원 맞은 편 현 사옥에 입주를 하면서 수맥 차단을 위해 회사 이름이 새겨진 금색 현판을 외벽에 붙였고, 대신증권은 작년 초 본사 정문 앞에 있는 황소 동상의 방향을 바꿨다고 한다.
이영태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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