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이라곤 온통 흙먼지뿐인 아프리카 중동부 부룬디의 작은 마을 마람뱌. 21세 청년 클라우드는 오늘도 말없이 마을의 염소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부룬디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후투족과 소수 부족 투치족의 갈등으로 촉발된 부룬디 내전이 끝난 지 6년. 한때 후투족 반군 소년병이었던 클라우드의 몸은 그사이 더 단단해져 전사의 모습에 가까워졌지만, 누더기 같은 바지에 여성용 샌들을 신은 외모는 초라하기 그지 없다.
그가 총을 쥐고 있을 때는 작은 체구의 소년에 불과했지만, 생활은 지금과는 달랐다. 클라우드는 “집을 떠나 덤불 속에서 살 때 내 삶은 아주 괜찮았다”고 소년병사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매복을 하다 차량을 공격해 얼마든지 물건들을 차지 할 수 있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동생들을 위해 생계를 꾸려야 하는데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클라우드는 내전으로 부모를 모두 잃어 혼자 가족을 책임지고 있다.
1993년 군부를 장악한 투치족이 최초의 후투족 출신 대통령을 암살하면서 내전이 시작됐을 때 클라우드는 세살짜리 어린 아이였다. 이후 12년 동안 내전이 계속되면서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가족과 친구가 늘어났고, 10대로 성장한 클라우드는 마침내 총을 잡기로 결심했다. 병사로서 뛰어난 자질을 타고난 그는 1년만에 사병에서 부사관으로 진급했다. 가족의 복수를 위해 반군에 들어갔지만, 어느새 그는 동료들처럼 살인과 강간을 밥 먹듯 했고, 아무 거리낌없이 물건을 강탈했다.
내전은 30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2005년 국제사회의 중재로 종식됐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반군인 민족해방군(FNL) 소속의 후투족 병사들은 일자리와 돈을 약속 받고 부룬디군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때 후투족 전력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던 9,000여명의 소년병들은 그들과 함께하지 못했다.
클라우드는 내전 종식 후 일자리를 얻기 위해 싸워야 했지만 허사였다. 1992년 247달러였던 1인당 국민소득은 내전이 끝난 뒤인 2004년에는 절반 수준인 128달러로 곤두박질쳤다. 클라우드와 같은 처지에 놓인 수 천명의 소년병 전우들은 지금 가난에 맞서 싸우고 있다. 그들은 “평화가 일자리와 돈을 가져다 주는데 실패했다”고 분노하고 있다. 르완다에 있는 부룬디 난민캠프에서 태어나 FNL을 도와 4년간 내전에 참여했던 여성 카렌 크리스티나(30)는 “평화가 우리를 평범한 생활로 돌려 보낼 것이라 생각했지만, 결국은 이 모든 걸 혼자서 견뎌내야만 한다”고 말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비교적 안정을 누리던 부룬디가 최근 상황이 급속히 나빠지면서 옛 소년병들이 다시 총을 잡으려 한다고 보도했다. 지난해 대선에서 피에르 은쿠룬지자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지만, FNL 지도자 어게이슨 르와사가 선거 불참을 선언한 뒤 콩고민주공화국으로 탈출한 이후 부룬디에서는 크고 작은 충돌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18일에는 수도 부줌부라 인근의 한 술집에서 반군으로 추정되는 괴한들이 총기를 난사해 36명이 숨지기도 했다.
다시 세를 불리려는 FNL은 전투 경험이 풍부한 소년병사들에게 손을 뻗치고 있다. 이들은 “입대하면 부룬디에서 일년 내내 벌어야 손에 쥘 수 있는 수입의 절반인 65달러를 주겠다”며 어린 소년들을 유혹한다.
클라우드와 크리스티나는 “반군에 다시 돌아갈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전쟁은 위험하지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기억은 고통스럽지만, 그나마 그 때 생활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 농민 출신의 반군들이 일상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이들에 대한 상담과 기술교육을 하고 있는 에릭 니라기라(31)는 “반군에 몸을 담았던 이들은 주변의 도움 없이는 쉽게 폭력의 세계로 돌아간다”고 경고했다. 그는 15세에 반군에 가담해 8년 동안 전쟁에 참여했던 소년병사였다.
이동현기자 nan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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