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의 탐욕을 비판하는 시위에 뉴욕 시민과 노조가 가세했다. 월가 시위는 이제 ‘가진 자’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에서 벗어나 사회의 불평등과 부조리를 고발하는 저항운동으로 승화하고 있다.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 20일째인 5일(현지시간) 오후. 세계 자본주의 심장인 월가가 있는 미 뉴욕 맨해튼의 남쪽은 시위대의 함성에 파묻혔다. 30분 전부터 집회장소인 뉴욕주 대법원 광장과 폴리 광장은 수많은 인파로 접근조차 어려웠다. 교사와 학생, 간호사까지 플래카드를 들었고, 재향군인과 노인들은 “힘을 합쳐야 한다”며 광장을 메웠다. 시위를 지켜보다 아이를 데리고 나온 시민, 퇴근길에 참가한 버버리 코트의 신사, 기성 언론과 정치권이 시위를 철저히 무시하는 것에 분노해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며 나선 사람들도 많았다. 인접한 차이나타운의 임차인 연합, 미 최대 노조인 산업노조총연맹(AFL-CIO)과 뉴욕시 교원노조, 교통노조도 동참했다. 주변 인파까지 합하면 2만명을 넘는 사람들이 월가의 탐욕을 비판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지난달 17일 20여명으로 시작된 ‘월가를 점령하라’가 거대한 시민운동으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월가 시위는 더 이상 불만에 찬 용감한 젊은이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광장 안은 난장판이었지만 축제였다. 쿠바혁명을 이끈 체 게바라 사진이 등장하고, 실업과 압류, 빚에 짓눌린 여성의 퍼포먼스가 열렸다. 밴드에 맞춰 춤추고 구호를 외쳐대는 한편에서 실업위기에 처한 우체부들이 인터넷을 탓했다.
월가의 탐욕뿐이 아니다. 인종주의 민주당 공화당 가난 전쟁 부유세 등 모든 것이 화두로 등장했다. ‘오바마=부시’‘월스트리트’‘아프간ㆍ이라크 전쟁 사망자 6,278명’ 등 너무 많고 다양한 구호와 주장 때문에 혼란스러웠지만, 모두 정의를 보루로 불의를 고발하려 한 점은 똑같았다. 특히 부를 독점한 1%가 아닌 ‘위 아 더 나인티나인 퍼센트(우리는 99%다)’를 외칠 때는 한 목소리가 됐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흑인 여성 설리나는 대법원 건물에 새겨진 ‘진정한 정의의 집행이 훌륭한 정부의 가장 굳건한 기둥이다’는 글귀를 가리키며 “월가 시위대가 무얼 말하는 지 상징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시위대의 함성은 집회에 이어 가두행진에 나설 때 절정에 달했다. 선발대가 출발한 지 1시간이 넘도록 광장을 빠져나가지 못한 시위대가 있을 정도로 행렬은 끝없이 이어졌다. 뉴욕시청을 거쳐 본거지 주코티 공원으로 돌아온 시위대는 벅찬 감동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광범위한 지지 여론을 확인하면서 시위를 계속할 명분과 에너지를 얻은 게 무엇보다 큰 수확이었다. ‘해방자’라는 별명의 시인이라고 밝힌 루스 존스는 “정말 놀라운 광경이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고 말했다. 이날 시위를 본 그는 ‘뉴욕의 가을에 온 미국의 봄’이라는 시제(詩題)를 떠올렸다.
이날 보스턴에선 200여명이 대학생과 간호사 등이 거리에 나섰고, 6일 시위를 앞둔 워싱턴에선 ‘기계를 멈추고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라’는 온라인 깃발이 시위 참가를 독려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여전히 침묵이다. 백악관은 이날도 논평을 내놓지 않았다. 공화당 대선 경선주자들은 “가난한 자신을 비난하라” “나는 백악관을 점령하려 할뿐”이라며 시위와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뉴욕=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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