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부가 출범했을 즈음의 이야기다. 정부 부처의 한 국장은 청와대에 갓 진입한 386 실세참모 들의 과다한 자료 제출 요구에 시달려야 했다. 의욕이 앞선 386 실세들이 정부 부처 공무원들을 상대로 '이 자료 내놔라, 저 문제에 대해 보고하라'는 등 온갖 지시성 요구를 해왔던 것이다. 그 국장은 참다 못해 청와대 386 참모들에게 "앞으로 자료 요구나 보고 요청은 공문으로 해달라. 그렇지 않으면 응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자칫 후환이 생길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386 실세들의 요구가 통상적인 업무 범위를 넘어서는데다, 만의 하나 문제라도 발생할 경우 자신이 뒤집어 쓸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확실히 문서로 남겨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항명 아닌 항명 덕분에 일은 대폭 줄어들었지만 그 국장은 청와대 386 실세 참모들과 척이 졌고, 결국 우려했던 대로 외곽 보직만 빙빙 도는 인사상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요즘 유통업계의 핫이슈인 공정거래위원회와 유통업체 간 수수료율 조정 과정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공문은 없고 말만 있다'는 점이다. 백화점 업계 주장에 따르면 9월 6일 공식적으로 가졌던 간담회만 봐도 공정위는 대형 유통업체 최고경영자(CEO) 어느 누구로부터도 합의문 사인을 받지 못했는데도 언론에는 "통 크게 합의를 봤다"고 발표했다. 이후에도 업체들의 움직임이 더디자 공정위 고위 공무원이 업체 임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수수료 인하가 영업이익율의 8~10%선이 되게 하라고 압박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어떠한 공식 문서도 업체에 전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전달사항을 녹취도 못하게 하고 "언론 플레이를 할 경우 가만 두지 않겠다. 털면 먼지 안나겠냐. 조사 나가겠다"는 등의 협박성 발언도 있었다고 한다. 백화점 업계에서는 공정위 담당자들이 추후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어떠한 증거도 남기지 않으려 한다고 의심하고 있다. 수수료 인하가 중요한 문제인 만큼 공정위는 당당하게 법적,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일을 추진해야 하는데도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더구나 공정위가 기업의 영업이익률까지 간섭하는 것은 부적절한 행태 아닌가. 아무리 동반성장 정책이 중요하고 다급하다 해도 정부가 나서서 기업의 영업이익률까지 통제하려는 것은 나가도 한참 나간 일이다. 주주도 있고 외국인 투자자들도 있을 텐데 기업 내부 구조상 이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문제다.
물론 정부가 물가를 잡고, 중소기업과 대기업이 동반성장하도록 하려면 유통업계의 유통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판단했기에 그같은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정부의 그런 노력을 굳이 폄하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같은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통계와 증거를 확보한 상태에서 매우 정교하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정부가 기업을 말로 압박하는 것은 기업들의 반발만 살뿐 정책적 효과를 보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기업들이 동반성장 시늉만 하다가 지금은 오히려 정부에 대들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 아닌가.
백화점도 문제는 많다. 급속한 성장 과정에서 약자인 중소기업에게 과다한 부담을 지워 원망을 샀고, 특히 일부 중소기업들은 백화점의 횡포에 시달리다 못해 문을 닫았다는 보도가 나올 정도니 이미지가 좋을 리 없다. 그렇다고 정부가 백화점을 폭리를 취하는 업계의 하이에나처럼 취급하고 영업이익률까지 간섭하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있다.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필요한 조치는 전화나 언론이 아닌 정해진 공식 절차나 문서를 통해서 해야 한다. 그래야 뒤탈이 없다.
조재우 선임기자 josus6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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