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인문주의를 계승한 문호 토마스 만은 소설 '파우스트 박사'에서 이렇게 썼다. "원칙적으로 네 명의 연주자 모두가 파가니니 같은 최고의 수준이 되어야 하고, 다른 세 사람의 파트도 숙달해야 하거든. 그렇지 않으면 성공적인 연주는 어림도 없지." 바로 현악 4중주의 이상이다. 만이 말한 것은 모든 것이 디지털 코드로 치환ㆍ복제된다고 믿는 21세기가 잊거나 외면하고 있는 것, 아우라의 세계다.
창립 114주년을 맞는 세계 최고(最古)의 음반사 EMI클래식의 한국 지사가 발매한 'Great Recording of the Century'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 또한 그 어디쯤일 것이다. 1926년 카잘스의 녹음에서 1982년의 음원까지, 모노와 스테레오까지를 포괄하는 아날로그 문화의 진수가 30장의 음반에 집성돼 있다.
얼마 전 내한 연주를 했던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의 부인으로 탁월한 첼로 주자였던 자클린 뒤 프레의 연주(20번째 음반)는 클래식이 얼마나 생동감 있게 되살아 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풍부하고 감각적인 음색, 손가락과 손목의 능숙한 사용, 과감하고도 솔직한 해석이 돋보이는 이 연주는 그의 정점이었다. 1967년 이 음반을 녹음한 그는 6년 뒤 희귀병으로 숨졌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과 인연을 끊었던 부쉬4중주단이 들려주는 슈베르트의 두 현악4중주(14, 15번)는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진중함의 결정체다. 전운이 짙게 감돌던 1940년대 유럽의 고뇌를 그대로 투영한 그 해석을 두고, 훗날 영국 BBC라디오는 "구할 수 있는 음반 가운데 최고"로 평했다(23번째).
1946년 프랑스의 여성 바이올린 주자 자네트 느뵈가 남긴 브람스와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초인적 열정의 산물이다. 녹음 작업 중 모든 연주자들이 쉴 때도 활을 놓지 않았던 그는 녹음 시작한 지 몇 시간 지나자 바이올린과의 마찰 때문에 목이 벌겋게 부어 올랐다. 게다가 골초였던 그는 끊임없이 담배를 피워대면서도 7시간 줄곧 작업을 해 동료들을 완전 녹초로 만들었다(11번째). 크라이슬러가 연주하는 그의 유명한 소품에는 박자의 구속을 뛰어넘은 듯한 레가토 주법 등 이 시대가 잃어버린 낭만성을 오롯이 구현한다(26번째).
원래 EMI의 명반 세트는 CD가 호황을 누리던 1998년 아날로그의 추억에 주목한 영국 본사에서 저간의 음원을 추려 220장을 한 세트로 발매한 것이 처음이다. 품절됐던 이 시리즈 음반은 한국 지사가 국내 클래식 애호가들의 요구에 주목하면서 다시 빛을 보게 됐다.
148쪽에 달하는 충실한 해설서는 보물찾기 지도로서의 소임을 다 한다. 이번에 일단 1,500세트가 시장에 나왔다.
장병욱선임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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