켜켜이 나이테처럼 쌓아온 연극 인생이 만들어주는 공감의 힘은 마술과도 같았다. 한일 두 원로 배우가 얼굴을 마주 한 건 평생 처음이었지만 마치 옛 친구를 만난 듯 스스럼없었다.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 참가작으로 7, 8일 국립극장 KB청소년하늘극장에서 공연되는 한일 공동제작 연극 '모래의 정거장' 출연을 앞두고 원로 배우 백성희(86), 시나가와 도오루(76)를 최근 연습장인 서울 문래동 문래예술극장에서 만났다.
"서로 연극 혼이 통하는 예술가 또는 그 이상의 예술덩어리로 교감할 수 있어 친근감을 느낀다." 두 거장의 상대 연기자에 대한 감촉이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똑같았다.
이번 만남은 '모래의 정거장' 같은 '침묵극'을 꾸준히 한국에 소개해 온 연출가 김아라씨 덕분에 가능했다. "올 봄 뇌졸중으로 쓰러져 응급실에 갔다가 겨우 살아났거든. 김아라 제안에 처음엔 못 한다고 했더니 '선생님, 수십 년 연극해 대한민국 최고라고 하면서 몸 아프다고 그대로 드러누워서 돌아가실 때만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 하는데 그 말이 너무 고맙더라고. 그래서 대사도 못 외울 거라고 걱정 했더니 '대사 없다니까요!' 하대.(웃음)"(백성희)
"지옥을 경험했고 지금의 삶은 덤"이라는 백성희의 건강 상태를 몰랐던 시나가와는 무대에 서기로 한 선배의 결심이 놀라웠고, 상대역은 아니지만 그렇게 함께하기로 한 무대가 기뻤다. "대배우의 훌륭한 부분을 훔치고 배워 일본으로 돌아가겠다"는 시나가와의 말에 백성희는 "아름답게 나이 든 이 배우와 이번 한번뿐 아니라 더 많이 같이 무대에 서고 싶다"고 화답했다. "제가 수염만 없었으면 아마 네 살은 더 어려 보였겠죠?" 선배를 향한 70대 일본 노배우의 대답에서는 어리광마저 묻어났다.
이번 연극은 대사 없이 극단적일 정도의 느린 움직임으로 미묘한 생활의 감성을 표현해 철학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일본 극작가 겸 연출가 오타 쇼고의 작품이다. 다양한 여행자들이 모래 벌판에 등장해 만나고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을 그려 가며 인간의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백성희는 젊은 여자를 보며 과거를 회상하는 노인으로, 시나가와는 꿈속에서 소년 시절로 돌아가 그리던 소녀를 만나는 노인으로 등장한다.
1988년 오타의 '물의 정거장' 출연을 위해 방한한 적 있는 시나가와에게 이 같은 침묵극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스피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대여서 사회는 물론 연극에서도 느린 것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는 사람이 많죠. 하지만 천천히 움직이는 과정에서 이 전에 보이지 않던 인간 존재의 또 다른 부분이 드러날 수 있어요. 침묵한다고 해서 내 안에 말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는 오타의 표현을 빌려 "인간의 삶은 가족 관계 속에 있거나 회사에 다니거나 하는 사회적 존재 가치만 부각되는 경향이 있다"며 "연극 역시 생명으로 존재하는 인간을 표현하는 일을 간과해 왔다"고 말했다.
연극에는 권성덕, 박정자, 남명렬, 오스기 렌 등 양국의 대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지만 이런 독특함 때문에 관객의 반응이 걱정거리다. 연극뿐 아니라 '하얀 거탑' 등 영화와 TV에서도 활약해 온 시나가와도 "어떻게 하면 관객이 잠들거나 중간에 객석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보게 할지 궁리 중"이라며 "관객의 상상력을 이끌어 내려면 대사 연기를 할 때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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