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초 제일저축은행 한 임원이 대출 대가로 1억8,000여만원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이 저축은행에 6,000만원 가량 예금을 갖고 있던 김모(47)씨는 소식을 접하고 부랴부랴 저축은행 창구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영업점은 예금을 찾겠다고 몰려든 고객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김씨가 받아 든 번호표는 1,900번대. 1주일 가량은 지나야 예금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당시 영업점에 나와 있던 금융당국 직원들은 뱅크런(예금 대량 인출)을 막기 위해 김씨를 비롯한 고객들을 설득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개인비리 조사일 뿐 제일저축은행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이 8%를 넘는 우량 저축은행이며 부산저축은행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설명이었다. 금융당국 수장인 김석동 금융위원장도 당시 언론을 통해 "영업을 잘 하고 진실한 저축은행이 많은데 한꺼번에 매도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필요하면 당국도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며칠 뒤 뱅크런이 진정되자 김씨는 금융당국의 말을 믿고 예금을 찾지 않았다.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지금, 하루 아침에 BIS비율이 마이너스로 추락하며 영업정지된 제일저축은행은 부산저축은행에 버금가는 불법과 비리의 온상이었던 것으로 하나 둘 확인되고 있다. 동일인 대출한도를 어기고 고양종합터미널 건설 사업에 1,600억원의 거액을 대출해줬고, 고객 1만여명의 명의를 도용해 불법 대출을 해준 사실도 확인됐다. 심지어 유흥업소에 여종업원들을 담보로 1,000억원대 거액을 빌려준 것도 적발이 됐다.
김씨처럼 제일저축은행에 5,000만원이 넘는 예금을 갖고 있는 고객은 6,000명이 넘는다. 물론 예금보장한도(5,000만원)를 초과해 예금을 보유한 데 대해서는 고객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지만, 금융당국에 대한 이들의 원망은 깊을 수밖에 없다. 김씨는 "금융당국 스스로도 해당 저축은행의 실상이 어떤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 고객들에게 안전하니까 돈을 찾지 말라고 설득을 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며 "적어도 해당 저축은행이 문제가 없는 우량한 은행이라는 얘기는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물론 금융당국의 어려움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뱅크런으로 금융 질서가 파괴되는 마당에 방관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고객들에게 잘못된 정보까지 흘려가면서 그들의 재산권을 침해할 권리가 금융당국에 부여된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그것은 기만이나 사기에 가깝다. 당시 금융당국 말을 믿고 예금을 찾지 않았던 김씨 같은 고객들에게 이제 뭐라고 설명을 할 텐가.
이영태 경제부 기자 yt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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