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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사람/ KAL 납북 생이별 42년…생환캠페인 벌이는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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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사람/ KAL 납북 생이별 42년…생환캠페인 벌이는 가족들

입력
2011.09.3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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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생이별을 한 뒤 할머니는 손자인 저를 껴 안으실 적 마다 '널 보면 니 에비가 생각나고 그러면 내 젖가슴이 찌르르 하다'며 눈물을 흘리셨어요."

28일 경기 의정부시 경기도북부청사에서 만난 '1969년 KAL납치피해자 가족회' 대표 황인철(44)씨는 평탄치 않았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MBC 강원지국 PD였던 아버지 황원(당시 32세)씨가 납북됐던 1969년 황 대표는 불과 2살이었다. 사건 이후 황 대표의 어머니는 스트레스성 외상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았고, 집안의 수입원이 없어진 황 대표의 집은 사회ㆍ경제적으로 풍비박산이 났다.

어려운 중에서도 황 대표는 아버지에 대한 자긍심을 잃지 않았다고 했다. 송환자들이 "황원씨가 공산주의 체제에 끝까지 항거했다.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가곡 '가고파'를 부르며 남쪽 고향을 그리워했다"고 증언했기 때문이다.

한평생 끌려간 아들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황 대표의 할머니(서봉희ㆍ1904년생)는 1996년 유언으로 '아들에 대한 그리움 마저 태워 버리고 싶다'며 화장을 원했지만 "아들이 돌아와 울어야 할 곳은 있어야 할 것 아니냐"는 가족들의 설득에 결국 강원 춘천시 선산에 묻혔다. 이후 15년이 지났지만 꿈에도 기다리던 아들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아들과 딸,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와 기가 막힌 생이별을 해야 했던 가족들이 27일과 28일 다시 모였다. 비록 미귀환 11가족 가운데 4가족 밖에 모이지 못했지만 무려 '42년만에 이곳에서 미귀환 11인의 생사확인과 송환을 위한 캠페인'을 진행한 것 만으로도 이들에게는 큰 걸음이었다. 가족회는 피랍일이었던 12월 11일까지 전국 각지를 돌며 42년전 발생했던 희대의 반인도적인 사건을 국민들에게 알릴 예정이다. 캠페인을 더할수록, 국민의 관심이 모아질수록 흩어졌던 나머지 가족들도 합류할 것으로 이들은 기대하고 있다. KAL기 피랍 사건은 1969년 12월11일 기장ㆍ승무원 4명과 승객47명(간첩 포함)을 태우고 강릉을 떠나 김포로 향하던 KAL기가 대관령 상공에서 간첩 1명에 의해 피랍돼 북으로 넘어간 사건이다. 국제 사회의 이목을 의식한 북한은 전원 송환을 약속했으나 이듬해 2월14일 정작 판문점을 통해 남으로 온 인원은 승객 39명뿐이었다. 승객 7명과 승무원 4명 등 11명은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왜 42년이 지나서야 목소리를 내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가족회는 "우리의 목소리는 '42년 만의 첫 목소리'가 아니다"고 말했다. "다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건 이후 납북자 가족들이 손을 놓고 마냥 기다리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가족들은 '납북 미귀환 11인 가족회'를 결성, 성충영(성경희씨의 아버지)씨를 중심으로 활발한 생환 활동을 벌였다. 여기저기서 캠페인도 벌였고 정부 부처의 문도 두드렸다. 하지만 정부는 '한반도 긴장완화'를 이유로 이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언론도 이들의 문제를 무게 있게 다루지 않았다. 급기야 79년 성씨가 사망하자 가족회 마저 구심점을 잃고 흐지부지 와해됐다.

그러던 중 2001년 제3차 이산가족 상봉에서 희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후덕씨가 딸 성경희(납북 당시 23세)씨와 극적인 모녀 상봉에 성공한 것. 당시 성씨는 "기장(유병하ㆍ당시 37) 부기장(최석만ㆍ당시 37)이 북한에서 잘 살고 있고 나머지도 직접 확인은 못했지만 잘 살고 있다고 들었다"고 이씨에게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회는 적십자사를 통해 끊임없이 가족들의 생사확인 및 상봉을 요청하며 불씨를 지펴 갔다. 하지만 2006년 6월 북한은 이들에게 "확인 불가능"이라는 무책임한 답변만 보냈다. 황대표는 "그 분들이 살아있든 그렇지 않든 자취는 남아 있을 것 아니냐. 확인 불가능하다는 통보는 있을 수도 믿을 수도 없는 답이며 남한의 가족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격앙했다.

안일하기는 우리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의 무책임한 통보에 대해 정부에 후속 대책을 요구했지만 정부 관계자는 '납북자는 이산가족으로 분류돼 생사확인 신청만 할 수 있을 뿐 답변 유무는 북한에 달렸다'는 원론만 늘어놓았다고 했다. 특히 정부의 귀환 및 생사확인 요구노력은 납북자들의 94%를 차지하고 있는 납북어부과 국군포로들에 집중됐고 이들은 소외됐다. 이러한 것들이 가족회가 직접 팔을 걷어 붙이고 거리로 나서게 된 이유다.

황씨에게 가장 아쉽고 두려운 점은 "이 같은 희대의 사건이 국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지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가족회 구성원들 조차도 '이젠 포기하자'는 분위기가 돌 때마다 참을 수 없다고 했다. 황 대표는 "정부가 '평화로운 남북 관계 유지를 우선시 해야 한다'며 KAL기 납북 문제를 가족의 아픔 정도로 치부하는 데 할 말을 잃었다"면서 "이제는 국민 여러분들이 사건의 실체를 알고 가족회에 힘을 모아 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미귀환 납북자 11인 명단

▦유병하 (남ㆍ당시37세ㆍ기장) ▦최석만(남ㆍ37ㆍ부기장) ▦성경희(여ㆍ23ㆍ승무원) ▦정경숙(여ㆍ23ㆍ승무원) ▦김봉주(남ㆍ28ㆍMBC카메라기자) ▦임철수(남ㆍ49ㆍ사업가) ▦장기영(남ㆍ41ㆍ국민운동 경기지부장) ▦채헌덕(남ㆍ35ㆍ자혜병원 원장) ▦황원(남ㆍ32ㆍMBC PD) ▦이동기(남ㆍ48ㆍ강릉 합동인쇄소 대표) ▦최정웅(남ㆍ30ㆍ한국슬레이트 강릉지점 대표)

의정부=글·사진 강주형기자 cubi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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