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 시절 장관들은 새벽에 느닷없이 "봐라, 니, 그것밖에 못하나"라는 김영삼 대통령의 전화를 받곤 했다. 대개 조간신문에 해당 부처의 잘못이 보도됐을 경우다. 김대중 대통령도 국회에서 다툼을 벌이거나 의원들로부터 평가를 받지 못하는 장관에 대해서는 점수를 주지 않았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언론의 비판을 맞받아치고 국회에서 의원들과 대적하는 각료를 좋아했다. 강골인 이해찬 총리가 국회에서 한 뼘도 물러나지 않는 논쟁을 벌이고 오면, 노 대통령은 전화를 걸어 격려했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도 비슷한 듯하다. 강만수 산은금융그룹 회장이 정권 초기 기획재정부 장관을 맡았을 때 의원들과 언쟁을 많이 벌였는데, 이 대통령은 그런 점을 소신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대통령 따라 다른 여의도 대하기
이런 대비되는 그림은 정치적 성장과정, 국회와 정당에 대한 시각 차이에서 비롯된 듯하다. 김대중, 김영삼 대통령은 국회와 정당에서 잔뼈가 굵었고 항상 그 중심에 서있었으며 여론에 민감했다. 재야, 시민운동가들을 끊임없이 충원, 변화를 꾀했지만 무게중심은 정당정치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노무현, 이명박 대통령은 제대로 된 당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노 대통령은 1988년 5공 청문회에서 혜성처럼 등장한 스타였지만, 일상의 정당정치에서는 변방이었다. 이 대통령도 국회의원, 서울시장을 거쳤지만 여의도에서는 이방인이었다. 두 대통령 모두 여의도 정치를 비효율적인 공론(空論)의 집단으로 평가절하했다.
안철수 돌풍이 휘몰아치는 요즘 시세로 보면 대중의 정서는 여의도 정치와 거리를 둔 노, 이 대통령 쪽에 기울 듯싶다. 하지만 세상은 정서만으로 되지 않는 법. 노 대통령과 이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서 가장 문제된 대목이 바로 소통 부재였다. 독선과 아집이라는 비판도 여의도 정치 무시 때문에 제기됐다.
정부가 뭐 좀 하려고 하면 여의도가 희한한 명분을 내세워 발목이나 잡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독단적 결정의 위험을 점검하는 민주주의의 요체인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외면할 경우 일시적으로 신선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외연을 축소시켜 추진력의 약화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각도는 다르지만,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도 비슷한 시험대에 올라와 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를 지원할지 여부를 말하는 것으로, 그 선택이 박 전 대표와 정당정치의 관계를 규정할 것이다.
당 안팎의 의견들은 주로 대권구도에 유리하냐, 불리하냐는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다. 지원해야 한다는 측은 이번에 박 전 대표가 팔짱만 끼고 있다가 패배하면 지지층과 보수층이 이탈할 것이며 선거 승리 시 "박근혜 없이도 할 수 있다"는 흐름을 형성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주로 당직자들로, 박 전 대표의 복지정책을 당론으로 채택하는 미세조정까지 하겠다는 입장이다.
지원을 반대하는 측은 국정 운영은 물론 당 운영에서 박근혜 사람들이 철저히 소외됐고, 또 박 전 대표가 MB의 국정 운영에 동의하지도 않고 차별화하는 마당에 선거지원에 나서면 자가당착에 빠진다는 것이다. 더욱이 서울시장 보선을 초래한 무상급식 반대가 박 전 대표의 복지노선과도 맞지 않는데 무엇을 내세워 지지를 호소하느냐는 것이다. 특히 선거 지원에 나섰다가 패배하면 박근혜 대세론이 한풀에 꺾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선거 지원은 정당정치 중시행위
의견이 분분하지만 박 전 대표는 아직 입을 열지 않고 있다. 고민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민은 유ㆍ불리의 계산에 머물지 않고 본질에 놓여야 한다고 본다. 그가 보수적 시민사회그룹과 손을 잡고 정계 개편을 시도, 한나라당 이상의 새로운 정치세력을 만들 게 아니라면, 정당정치를 건강하게 만드는 차원에서라도 선거 지원에 나서는 게 맞지 않을까 싶다. 정당정치의 중심에 서온 박 전 대표가 시대흐름과 국민 바람을 확인할 수 있는 진검의 승부처를 더 이상 피해가기는 힘든 시점이 된 것 같다.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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