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 현대무용의 개척자이자 무용계의 영원한 스승 박외선 선생이 미국 시카고에서 9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오래 전 한국을 떠나 이국에서 생을 마감해 선생의 부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 같다. 박 선생은 아동문학가 마해송 선생의 아내이자 재미 의사인 마종기 시인의 모친으로도 유명하다.
우리 무용사에서 박 선생은 그 누구보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잘 어울린다. 선생은 일제시대 일본에 유학해 발레를 익힌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60년대 초반 미국의 마사 그레이엄 현대무용 기법을 국내에 처음 도입한 인물이다. 한국 최초로 대학 무용과 창설을 주도해 춤의 지성화를 앞당겼고, 무용계 패러다임을 바꿔 놓았다. 또 국내 최초의 무용이론서인 (1961)을 비롯 여러 권의 저서를 펴내며 무용학의 기틀을 다졌다.
15년 경남 진영에서 태어난 박 선생은 마산여고 3학년때 최승희 춤에 매료돼 무용가가 될 것을 결심한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다카다 세츠코 문하에서 발레와 현대무용을 체득하고 일본문화학원 불문과에 진학해 인문적 교양을 쌓는다. 이러한 배움의 내력은 후일 문학적 감성이 투영된 작품창작과 무용학의 이론정립에 귀중한 자양분이 된다.
박 선생은 34년 동경에서 '신예 무용가 탄생'이라는 언론의 찬사를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한다. 일제치하에서 조선인이라는 자각과 민족의식이 투영된 작품창작으로 조선유학생들에게 깊은 감명을 안겨주었다. 자국의 전통과 민족성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고자 하는 의지는 시인 이육사와의 인터뷰에도 피력되어 있다. 30년대 중반 영화의 주연배우로 출연하는 등 박 선생은 일본 문화계에서 주목받는 스타로 발돋움한다.
이렇듯 미래가 촉망되던 그는 37년 근대 최고의 문화지성 마해송 선생을 만나 결혼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신무용가 조택원이 무용발표회 홍보와 후원을 상의하기 위해 춤파트너인 박 선생을 대동하고 당시 사장으로 있던 마해송 선생을 찾은 것이 인연이 됐다. 개성 출신의 마선생은 니혼대 예술과를 졸업하고 일본 문단의 권위자 기쿠지 칸의 문하생으로 편집장을 거쳐 을 창간해 유력 대중연예잡지로 키워낸 '파워맨'이었다. 일본 문화계를 쥐락펴락한 마 선생은 식민지배하에 제국의 한복판에서 일본인을 호령하는 통쾌함을 과시한 보기 드문 인물로 회자된다.
박 선생 부부는 부부는 광복직전에 귀국했다. 이후 마 선생은 아동문학과 어린이를 위한 계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박 선생은 63년 이화여대 무용과 신설에 산파역할을 하고 77년까지 재직하며 수백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춤아카데미즘 제1세대 무용가 대부분 박 선생의 우산아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생은 다작의 무용가는 아니지만 주옥같은 명작을 남겼다. 김수영 시인의 '풀'을 소재로 한 , 남편 마 선생과의 사별의 슬픔을 묘사한 등이 손꼽힌다. 시적 감수성과 탁월한 주제의식으로 현대무용의 새로운 공연미학을 창출한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맨발로 춤추지만/ 우리 어머니/ 겨울눈도 뿌리는데/ 동대문 시장에서/ 구제품 구두를 사신고/ 출퇴근 버스에 밟히면서/ 꿈같이 꿈같이 춤추는 어머니". 아들 마종기 시인의 모정이 묻어나 있는 시의 한 구절을 떠올려 본다.
비록 동대문 시장의 구제품 구두를 신고 다닐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영위했지만, 퇴직금 전액을 후학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귀탁할 정도로 박 선생은 풍요롭고 고귀한 영혼의 소유자였다. 교육자로서의 말년 행보는 광복직전 귀국해 66년 작고하기까지 일체의 공직을 마다하고 청빈한 삶으로 일관한 마 선생의 행적과도 빼 닮아 있다.
성기숙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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