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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이게 포스터지 작품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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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이게 포스터지 작품이냐?"

입력
2011.09.29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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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로 유학 가서 처음 머물렀던 대학의 기숙사 거리 이름이 에티엔 돌레다. 편지봉투에 Etienne Dolet라는 글자를 꼭꼭 눌러쓰면서도 그때는 그가 누군지 몰랐다. 돌레는 근대 최초의 번역 이론가다. 2009년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서울에서도 학술대회가 열렸을 만큼 그는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당시 그는 단 한 줄의 신학적 오역 때문에 교수된 뒤 화형에 처해졌다. 그의 책들도 유해와 함께 불에 던져졌다.

석연치 않은 도라산역 벽화 철거

심판을 받은 뒤 부활한다고 믿었던 중세인에게 육체를 소멸시키는 화형은 가장 무서운 형벌이다. 불에 태우는 것은 그만큼 잔혹한 상징성을 갖는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나치가 베를린에서, 그리고 마오주의자들이 티베트에서 책을 소각한 일은 야만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예술작품을 불태우는 일이 벌어졌다. 노무현 정부 시절 경의선 도라산역에 만들어졌던 화가 이반의 대형 벽화를 통일부가 작년에 철거했다가 올 해 3월 소각 폐기했다.

이미 도라산역 벽화는 작년 5월 통일부가 작가와의 사전협의나 통보 없이 일방적으로 철거해 논란이 되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작가가 남북출입사무소에 문의했으나 도라산역 방문객 140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민중적이다 무당집 같다"고 평가해 작품을 철거했다고 한다.

미국에서도 공공예술 작품이 철거된 사례가 있지만 이렇게 무지막지하지는 않았다. 1981년 미국 연방 조달청의 의뢰로 조각가 리처드 세라가 설치한 '기울어진 호'는 시야와 보행을 방해하며 감시카메라 작동을 가로막아 마약상들이 거래 장소로 활용 할 수 있고 폭탄 테러의 위험이 있다는 등의 이유로 철거 논란에 휘말렸다. 하지만 철거되기까지 8년 동안 여러 과정을 거쳤다. 철거 운동은 1,300명의 청원을 받아 시작되었고 토론과 청문회를 거쳐 재판까지 받았다.

세라의 작품 철거에서 문제가 된 것은 미학적 내용보다는 설치 장소의 적절성 여부와 시민에게 물리적 불편을 준다는 이유가 컸다. 반면 통일부에서는 "전반적으로 어둡고 난해하여 이해할 수 없다. 정치 이념적 색깔이 가미된 민중화 같다. 일부 외설·혐오스러운 표현이 있다. 일반인이 찾는 공간에 음침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며 내용과 표현을 문제 삼고 있다.

1985년 '힘전'사태 때 경찰이 "이게 포스터지 작품이냐"라며 전시중인 작품들을 떼어내고 작가들을 구속했던 예술 탄압의 망령을 보는 듯하다. 정치적이고 이념적이고 혐오스럽고 음침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도라산역 벽화가 아니라 그렇게 말 하는 통일부 자신이 아닌지 돌이켜 볼 일이다.

이반은 분단과 통일의 주제를 가장 깊이 있게 다룰 수 있는 작가다. 그는 DMZ 작가로 불릴 만큼 수십 년간 비무장지대를 무대로 분단과 평화, 생명과 자연이라는 주제로 작업해 왔다. 작가는 도라산역 벽화에도 이 주제를 담았고 "50년 화가생활의 모든 것이 응축된 내 분신과도 같은 작품들"이라고 할 만큼 심혈을 기울였다. 이렇게 한 작가의 일생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을 함부로 평가하고 불태워 버릴 수는 없다.

표현의 자유 보장돼야 선진국

영국의 예술비평가 허버트 리드는 예술은 세 가지 면에서 뒷받침 되어야 한다고 했다. 사회적으로는 올바른 감상과 평가에 의해서, 경제적으로는 후원에 의해서, 본질적으로는 자유에 의해서이다. 도라산역 벽화 철거와 소각 사건을 보더라도 지금 한국의 창작 여건은 그 어느 것 하나 충족되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런 환경에서 문화예술이 꽃피울 수 없다.

이 사건이 유야무야 되어서는 안 된다. 치열하게 쟁점화 되어 예술 작품의 저작권과 표현의 자유를 보호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예술에 대한 국가의 검열과 폭력의 망령이 다시는 부활할 수 없도록 이번에 소각 폐기되어야 한다.

전강옥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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