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적인 시작이었고, 충격적인 결말이었다. 초반엔 폭소를 불렀다가, 결국엔 씁쓸함을 안겼다.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첫 소개됐고, 10월 부산영화제에서도 상영될 이탈리아 블랙코미디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감독 난니 모레티)는 교황 선출이라는 소재부터 범상치 않다. 새 교황을 뽑기 위해 모인 세계의 추기경들이 서로 교황이 되기를 주저하고, 교황으로 선출된 인물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거부하려 한다는 내용은 웃음만으로 마주할 수 없다.
견딜 수 없는 속세의 무거움 탓일까. 교황이 될 추기경은 정신과 의사와 만나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 동안 세상을 위해 살아왔는데 왜 나에게 또 이런 시련과 의무를…"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는 정의는 온데간데 없고, 갖은 갈등으로 얼룩진 지구촌 현실에 대한 우화처럼 다가온다. 종교인이 최고의 영예마저 마다하고 싶어지는 현실이라니.
한국영화 '도가니'에서 유독 눈에 들어오는 단어들이 있다. '자유 평등 정의'. 청각장애 학생들을 성적노리개로 다루던 교장과 교사 등에 대한 재판이 이뤄지는 법원 입구에 쓰여진 단어들이다. 자유 평등 정의는 글자로서 선명하게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피해 학생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토로할 기회도, 법 앞에서 평등할 권리도, 피의자를 엄단하는 정의조차도 누리지 못한다.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치부를 '도가니'는 그렇게 들춰낸다.
'도가니'가 정의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면 29일 개봉하는 '의뢰인'은 실체로서의 정의란 무엇인가 묻는다. 편법을 써서라도 연쇄 살인 용의자를 단죄하려는 검사, 의뢰인의 결백을 의심하면서도 정당한 방법에 의한 법적 해결을 추구하는 변호사는 대척점에 서서 정의를 말한다. 정의를 바라보는 지금 이 사회의 혼란스러운 시선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유료 시사회를 거쳐 22일 개봉한 '도가니'를 26일까지 100만 관객이 찾았다. 마음 불편한 내용을 담은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로선 기대 밖의 성적표다. 부당한 현실에 대한 관객들의 분노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갈구가 낳은 결과라 하면 지나친 해석일까.
영화는 시대의 징후다. 충무로가 정의에 대해 묻고 관객이 화답하는 현실은 위로와 더불어 쓰디 쓴 뒷맛을 남긴다. 우리 사회는 어쩌면 정의와는 너무 먼 곳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처럼 교황 선출자조차 떠안고 싶지 않은 그런 곳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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