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국회의원이 있다면 북한에 가서 국회의원 하라." 한나라당 박영아 의원의 이 발언이 국회 교육과학위원회의 국정감사를 이틀간 파행으로 내몰았다. 논란은 교육과학기술부가 중ㆍ고교 역사 교과서 서술의 잣대인 '교과 교육과정'에 사용된 민주주의 용어를 졸속으로 바꾼 데서 비롯됐다. 역사교육과정개발추진위원회가 새 역사교과서의 가이드라인으로 선택한 '4ㆍ19 혁명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민주주의의 발전을 설명한다'는 문구를 '1960년대 이후 자유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성장 과정을 이해한다'로 수정한 것. 핵심은 '민주주의'란 용어가 '자유민주주의'로 바뀐 것이다. 이에 반발해 일부 위원들이 사퇴했고, 정치권에선 색깔논쟁으로 번졌다.
갑작스러운 용어 논란
한국일보 보도(9월22일자1면)에 따르면, 정부 수립 이후 7차례 제ㆍ개정된 역사 교육과정에서 '자유민주주의'란 용어는 1992년 6차 교육과정에서 단 한 차례 사용됐을 뿐이다. 그 외에는 모두 '민주주의' '민주국가'라는 용어가 채택됐다. 그런데 왜 이 시점에서 갑자기 '민주주의'란 용어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
'자유민주주의' 용어를 고집하는 이들은 우리 교육현장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전면 부정당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한다. 정말 그런가. 1970-8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나는 교과서나 교육과정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에 대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학습받았다. 당시 교육과정에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사용됐는데도 말이다. 여기서 자유민주주의는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주로 사용됐다. 진보 정권 10년 동안 역사교과서 서술에 문제가 있었던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도 따지고 보면 과거 권위주의 정권 시절 왜곡된 민주주의에 대한 바로잡기일 뿐,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라 할 수 없다.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만으로는 우리사회 근현대사의 흐름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미래 발전상을 매우 좁게 규정하는 결과가 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는 자유민주주의로만 설명될 수 없는 요소들이 적지 않고, 그런 흐름들이 역사발전에 기여한 측면을 결코 무시해선 안 된다. 따라서 교과서 서술의 가이드라인으로서 자유민주주의보다 포괄적인 개념인 민주주의가 사용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도 이 정부가 이 시점에서 굳이 논란이 되는 용어를 졸속으로 바꾸려는 것은 권위주의 시절의 반공교육 일변도로 회귀하고자 하는 의도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로의 용어 변경을 주장하는 이들은 헌법상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라는 표현을 중요한 근거로 주장하지만, 우리 헌법에는 자유시장주의자들이 폐지를 주장하는(그럼으로써 그들 스스로 우리 헌법이 자유민주적이지만은 않음을 인정하는) '사회민주주의적 가치'가 반영된 조항들이 적지 않다. 경제 민주화를 위해 개인의 기본권을 국가가 일정부분 제한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대표적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의도적 왜곡
황우여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사회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한 계파로 파악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서구 민주주의 발전 역사에서 사회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돼왔다는 점에서, 그리고 권위주의 시절 우리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좁고 왜곡된 의미로 쓰여왔다는 점에서 그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박영아 의원이 동료 의원에게 퍼부은 독설은 자유민주주의 용어를 고집하는 이들의 의도를 뚜렷이 보여준다.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주장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북한체제를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도 박 의원을 비롯한 보수 인사들이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고 있다. 그리고 함부로 '빨간색'을 칠하려 하고 있다.
김상철 사회부장 sc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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