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 나오토(菅直人) 전 일본 총리는 퇴임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후쿠시마(福島) 제1원전 사고 당시 앞으로 도쿄에 사람 한 명 살지 않고, 수도권이 궤멸되는 위기감을 느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간 전 총리가 그런 위기감을 느낀 것은 원전사고가 발생한 지 4일 뒤인 올해 3월 15일 도쿄(東京)전력 측이 직원들을 원전에서 철수시키려 했기 때문이다.
황당한 도쿄전력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긴박한 상황에서 도쿄전력이 직원 철수 조치를 취한 이유를 알고 나면 실소가 절로 나온다. 당시 원전 주변의 방사성 물질 농도는, 현지 작업자에게 허용된 피폭수치(연간 50밀리시버트)를 초과했다. 도쿄전력은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작업자들을 철수시켰고, 수시간 후 피폭허용치를 연간 250밀리시버트로 상향 조정한 뒤 그들을 현장에 재투입했다. 이 사건은 극단적인 매뉴얼 사회 일본의 단면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로 거론된다. 매뉴얼을 고치는 동안 현장 직원들이 원전 복구 작업을 계속했더라면 피해를 조금은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아쉬워한다.
최근 후쿠시마 원전 사고 피해 주민 보상이 본격화하면서 도쿄전력은 또 다시 예의 매뉴얼을 들이대 피해자를 두번 울리고 있다. 도쿄전력이 12일부터 개인에게 발송하고 있는 피해보상 청구서류는 기입 방법을 적은 설명서만 156쪽에 달한다. 피해자가 써야 할 배상청구서 분량도 60쪽이나 된다. 난해한 전문 용어를 설명한답시고 수학공식을 적용한 그래프까지 곁들였다. 여기에 과거 급여명세서, 피난 관련 비용을 증명하는 영수증도 첨부토록 했다.
도쿄전력이 이처럼 장황한 보상청구서류를 작성한 것도 회사가 정한 매뉴얼에 따른 것이다. 도쿄전력은 매뉴얼에 따라 피해 항목을 상세하게 설명하다 보니 서류가 두꺼워진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주민들은 불만을 터뜨린다. 피해자의 상당수가 고령자여서 서류를 이해하기가 어려우며, 급박한 상황 속에서 피난을 강요당한 주민들이 재해 관련 영수증을 따로 모을 리가 만무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후쿠시마현 후타바초 주민들이 "이렇게 두꺼운 서류에 답하지 않으면 보상을 해주지 않겠다는 것이냐"며 도쿄전력의 고압적인 태도를 비난하자 주민설명회가 중단되기도 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자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 경제산업장관이 도쿄전력측에 서류를 다시 만들 것을 요구했지만 도쿄전력은 고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무리한 적용은 자기방어
매뉴얼 사회 일본의 장점은 분명 많다. 예외가 끼어들 여지가 없어 투명 사회를 만들 수 있으며, 일에 있어 실수할 여지가 줄어 완성도 높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해 나락으로 떨어졌던 일본이 제조업을 기반으로 경제 강대국으로 다시 설 수 있었던 것에도 매뉴얼에 의한 빈틈없는 일 처리가 한 몫 했다.
하지만 분초를 다투는 위기상황에서 매뉴얼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특히 도쿄전력은 원전사고를 일으킨 가해자라는 점에서, 자신의 조직을 방어하기 위해 매뉴얼을 이용한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도쿄전력이 조금이라도 사고에 대한 반성의 의지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좀더 쉽고 빠른 보상을 위한 새로운 매뉴얼을 만들어 주민들과 협상에 나서야 한다.
한창만 도쿄특파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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