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가 리먼 브러더스 파산과 비견될 심각 단계로 진입하며, 이제는 위기의 진원지 그리스에 채무불이행(디폴트)을 허용하는 것이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밑 빠진 독에 뚫린 구멍이 생각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이미 채운 물을 일부 포기하고서라도 아예 독을 깨버리는 게 추가로 들어갈 물을 더 아낄 수 있다는 것이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유로존 수호 의지에도 불구, 구제금융에 가장 많은 돈을 대야 할 독일에서 디폴트 용인론이 가장 활발하다. 23일(현지시간) 시사주간 슈피겔은 '구제금융 전략의 치명적 실수'라는 기사에서 "채무 탕감은 전체 채무의 30~50%를 줄여 은행에 타격을 주지만, 금융권 위기가 오더라도 구제금융의 대가로 치를 결과보다 더 쉽게 관리될 수 있을 것"이라 분석했다. 25일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도 ▦은행 구제 ▦그리스 디폴트 허용 ▦유럽재정안정기금(EFSF) 확충 등을 포함한 2조유로 규모의 계획이 주요20개국(G20)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다며 디폴트설에 힘을 실었다.
슈피겔에 따르면 그리스를 추가 지원하는 것보다 디폴트 시키는 게 훨씬 적은 비용이 드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학자 하랄드 하우와 베른트 루케는 채권을 탕감할 경우 독일 은행권에 320억유로의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평가했는데, 이는 구제금융시 EFSF에 부담해야 할 2,110억 유로의 15%에 불과하다.
일부 전문가는 그리스 입장에서도 디폴트가 나은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는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고 유로존을 탈퇴하면 자국통화 평가절하로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2001년 디폴트를 선언했던 아르헨티나의 당시 중앙은행 총재 마리오 블레저도 "긴축과 민영화 요구를 지켜도 빚 부담은 는다"며 디폴트를 권유했다.
이들은 디폴트를 용인하되 그리스가 앉아서 부도를 맞도록 방치하는 게 아니라 유로존 등이 나서 디폴트 절차와 채권탕감 비율을 사전 통제하라고 주장한다. 필립 뢰슬러 독일 경제장관이 제시한 이른바 '질서 있는 디폴트'다. 위기상황을 끌고 가느니 차라리 충격요법을 통해 악재를 단번에 털고, 상황을 통제하며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스페인 등 죽어선 안 될 '대마'들이 다음 타자로 줄을 서 있어 그리스 디폴트가 쉽사리 통제되지 않으리라 보는 시각도 있다. 특히 유로존이 역내 디폴트를 용인하는 전례를 만들 경우, 유럽연합(EU)이 유사시 회원국을 포기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져 재정위기 국가의 국채이자가 천정부지로 치솟을 수 있다. 이것이 연쇄 국가부도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는데 이 디폴트는 당연히 '무질서한 디폴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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