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 수입 맥주회사의 마케팅 담당 임원이었던 김은형 비틀맵(47) 대표는 프랑스 파리 여행 중 맥도널드 매장에서 '맥 맵(Mac Map)'을 보는 순간 '번쩍'했다. 맥 맵은 파리의 맥도널드 매장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 하지만 밋밋한 약도가 아니라 아기자기한 그림이 곁들여진 눈길을 확 끄는 지도였다. 그는 순간 "지도로 사업을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원룸에서 직원 2명을 데리고 지도사업을 시작했다. IMF 구제금융이 결정되기 바로 이틀 전인 1997년 12월1일에 사업을 시작했으니, 출발으로는 최악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밑바닥에서 시작한 것이니 차라리 잘 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핵심은 어떤 지도를 그리느냐였다. 남들과 다른 지도를 만들기 위해, 남대문 시장에서 색을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구해다가 칠하고 지우고를 수 없이 반복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세계 최초의 '수채화 형식 3D 입체지도'였다.
비틀맵 지도는 자를 쓰지 않는다. 컴퓨터 그래픽도 없다. 오직 손으로만 만든다. "디지털과 선의 차가운 느낌대신 아날로그의 따뜻함을 주고 싶었다"는 김 대표는 "낯선 외국인들도 쉽게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건물과 지형을 입체적으로 그리려고 했다"고 말했다.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항공지도를 볼 수 있고, 차에 달린 내비게이션도 대부분 3D입체지도이지만, 평면 지도 밖에 없었던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시도였다.
만드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우선 몇 배 이상의 발품을 팔아야 했다. 김 대표와 직원들은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다니며 건물과 지형을 파악해야 했고, 유적지ㆍ문화재ㆍ특산물 등 특별한 주제를 담기 위해 관련 전문가와 서적 등을 통해 내용 검증도 해야 했다. 게다가 그 내용을 손으로 그려야 했으니 몇 십 배 힘들 수밖에 없었다. 대동여지도를 그렸던 김정호의 마음도 그랬을까. 김 대표는 "몸과 손으로 인내심을 갖고 작업을 해야 했던 탓에 중간에 그만 둔 직원도 여럿"이라고 전했다.
2년 가까이는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만든 잡지 형식의 지도에는 명품 브랜드 광고를 유치하는 새로운 방식의 영업을 구사했지만 2년 동안 반응이 없었다. 김 대표는 "명품 브랜드를 잡아야 중저가 브랜드 광고도 따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명품만을 공략했다"며 "2년 정도 지나고서 한 브랜드가 광고를 하자 다른 경쟁 브랜드도 앞다퉈 광고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랴. 손과 발품을 팔아 만든 비틀맵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찾는 이들이 빠르게 늘었다.
특히 지방자치단체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그는 "특산물, 문화재, 축제 등을 알리려는 지자체들의 작업 의뢰가 물밀 듯 쏟아졌다"며 "나중에 컨텐츠를 다양하게 쓰기 위해 돈을 덜 받더라도 지자체와 공동저작권을 갖기로 했다"고 말했다.
처음 대학로, 신촌 지도로 시작한 비틀 맵의 지도는 현재 수 백 가지 이상으로 늘었고 매출도 쑥쑥 늘고 있다. 지난해 매출은 33억 원. 지금은 ▦전국의 물 좋은 곳을 모은 '물 여행' ▦피로를 풀 수 있는 '힐링 트러블' ▦몸에 좋은 소금과 그 염전을 소개하는 '소금여행'등 테마별 지도로 외연을 넓히고 있다. 최근 전국 각지의 친환경 먹거리를 알리는 지도를 만들었는데, 김 대표는 "이 지도가 우리 몸에 맞는 먹거리를 살리는데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비주얼(Visual)은 심리"라며 "지도를 통해 만든 이와 보는 이가 서로 마음을 나누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대표는 지난해까지 계간지였던 '비틀 맵'을 올해부터 월간지로 바꿨다. "크게 늘고 있는 중국 관광객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그는 "제주도를 선호하고 기름기 많은 음식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취향을 감안해 관련 내용을 강화했다"고 소개했다.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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