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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호의 헬로] 김인식 전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동원이는 프로야구 자체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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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호의 헬로] 김인식 전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동원이는 프로야구 자체였지"

입력
2011.09.2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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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를 전설 풍만의 생명체로 우뚝 세워 팬들을 마냥 행복감에 젖게 했던 김인식(64) 전 한화 이글스 감독. 그는 야구 월드컵으로 불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두 차례나 한국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온 국민을 와락 흥분의 도가니로 밀어넣으며 행복으로 이끈 말 그대로 '국민 감독'이다.

그런데 국민들과 야구팬 말고도 또 한 사람 그를 결코 잊지 못했던 이가 있다. 바로 얼마 전 53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국 야구의 빛나는 별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 2005년 야인으로 떠돌던 그를 한화 투수코치와 2군 감독으로 발탁한 것이 김 감독이다. 그래서 고 최동원은 생전에 "내게 기쁨을 준 사람"이라며 김 감독에 대한 존경과 감사를 잊지 않았다. 그러니 고인의 죽음에 직면한 김 감독의 마음이 어떨지는 짐작이 간다. 그가 고인의 빈소를 남보다 먼저 찾아 아픈 가슴을 탕탕 친 것도 당연한 일이다.

_ 2005년 최동원 전 감독을 한화 지도자로 불러들였는데.

"최 전 감독은 2001년 한화 투수코치가 됐는데 1년 만에 잘렸어. 2004년 가을 한화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그 사람 생각이 나더라고. 놀고 있던 그에게 연락해서 '같이 하자'고 했지. 그래서 2005년 투수코치로 복귀했어. 2006년 시즌에는 2군 투수코치를 시켰다가 2007년부터 2008년까지는 2군 감독을 시켰지."

_ 야인으로 있으면서 지도자로서의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최 전 감독을 발탁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그는 선수 생활을 정말 화려하게 한 사람이야. 이런 사람에겐 선수들도 따르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어. 또 자기가 가진 기량을 후배들에게 잘 전수하지 않겠나 여겼어. 물론 선수로서 잘했다고 잘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나에게 준 이미지는 그랬지. 나중에 지도자로 성공할 그런 사람. 실제로도 열심히 잘해줬고."

_ 최 전 감독이 지도자로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이 1988년 프로야구선수회를 주도하다 친정 롯데 자이언츠에서 팽 당한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는 얘기도 있었는데, 그런 부분은 부담이 안 됐나.

"최 전 감독이 그런 낙인이 찍혀 불이익을 받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_ 최 전 감독과는 어떻게 알게 됐나.

"1986년 해태 타이거즈 수석코치로 부임했는데 그때 그가 롯데에 있었어. 오다가다 인사하는 사이가 됐지. 워낙 압도적인 상대 팀 선수이고 유명 선수니까 경기하는 모습도 관심있게 봤어. 더구나 우리 절대지존 투수인 선동렬 전 삼성 라이온즈 감독과 만나면 빅카드가 되니 더 신경을 쓸 수밖에."

_ 최 전 감독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선수였나.

"프로다웠어. 항상 당당한 모습이 참 매력적이었지. 볼도 좋았고. 다이내믹한 폼으로 위에서 직구를 내리꽂았어. 커브 역시 완성도가 높았고. 말할 필요도 없이 한국 프로야구 그 자체였어. 그와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선동렬 전 감독 정도가 있을까. 선 전 감독은 낮게 깔리는 슬라이더가 일품이었지."

_ 당시 팀에서 선 전 감독이 아닌 최 전 감독을 데리고 있었다면 해태 성적이 어땠을까.

"해태의 9번 우승은 우연이 아니야. 선 전 감독도 있었지만 나머지 선수들이 강했기 때문에 가능한 기적이었어. 전부 대표선수잖아. 그러니 최 전 감독이 했어도 성적은 비슷했을 거야."

_ 최 전 감독이 한 팀이었다면 무엇을 가르쳐줬을 것 같은가.

"런너 견제, 번트 수비 같은 건 최 전 감독이 선 전 감독보다 낫다고 못해. 구위는 뛰어날지 모르지만. 그런 부분을 가르쳐줬겠지. 그랬다면 놀란 라이언(미국의 유명 프로야구 선수)이 됐을려나."

_ 그의 경기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사람들이 대부분 1984년 롯데_삼성의 한국시리즈에서 그가 혼자 4승을 차지하고 우승한 것을 기억하잖아. 그런데 난 좀 달라. 최 전 감독과 선 전 감독의 1987년 5월 16일 경기야. 두 사람이 모두 세 번을 붙었는데 첫 두 판은 한 번씩 승리를 나눠 가졌어. 그리고 1987년이 마지막 맞대결이었는데 결과는 연장 15회 2대 2 무승부였지. 최 전 감독은 209개, 선 전 감독은 무려 232개의 공을 던졌지."(현재 두 투수의 맞대결을 소재로 한 영화 '퍼펙트 게임'이 제작되고 있다)

_ 선 전 감독이 '뭐 저런 괴물이 있냐'며 혀를 내둘렀겠다.

"표현은 안 하지만 마음에 남아 있었겠지. 참 대단하다고."

_ 최 전 감독이 그런 폼으로 그렇게 공을 잘 컨트롤할 수 있었다는 데 놀라는 사람도 많은데.

"그가 아니면 안 되는 폼이야. 다른 선수는 못 따라 舊? 허리 나갈 걸."

_ 최 전 감독이 사망하기 직전에 통화했다는데.

"두 달 반 전 전화가 왔었어. 오히려 내게 건강이 어떠냐 물으며 자기는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라고. 이후 장효조 전 삼성 2군 감독이 사망하고 마음이 찜찜해 전화를 해 봤는데 안 받았어. 느낌이 안 좋았지. 아니나 다를까 동생이 다시 전화하더니 전화를 받기 힘든 상황이라고 하더군."

_ 최 전 감독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벌떡 일어나 그 멋진 볼 한번 더 던져 달라, 너 같은 투수를 한번 키워 달라는 말을 정말이지 전하고 싶네."

_ 장효조 전 감독과도 인연이 있나.

"최 전 감독과 마찬가지로 상대 팀의 발군의 선수였잖아. 그래서 알게 됐지. 장 전 감독도 살아 있고, 최 전 감독도 살아 있어서 둘이 1군 감독이 돼 한국시리즈를 하면 얼마나 좋겠어."

_ 제자로서 기억에 남는 선수를 꼽는다면.

"한화에서 마지막까지 같이 했던 김태균(일본 치바롯데 마린스) 이범호(기아)는 참 잘 이해하는 선수였지. OB와 두산 때는 박명환(LG) 김동주(두산)가 애제자고, 박철순 장호연 김상호는 감독 초년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지."

_ 제자들이 인사는 오나.

"뿔뿔이 흩어져서, 뭐…."(하지만 김 감독은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_ 김태균, 이범호가 일본에서 실패한 것은 참 의외인데.

"한국에 온 미국이나 남미 선수 가운데도 분명 실력이 있는데 못하는 선수가 있는데 이것은 문화 적응에 실패한 것이지. 두 선수도 그런 것 같아. 또 외국 가면 용병이 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좋은 성적을 내야 하는 게 부담이 됐겠지."

_ 2009년 한화 사령탑에서 물러날 때 섭섭한 마음은 없었나.

"일단 건강이 안 좋았어. 성적도 안 좋았고. 물론 주축 선수가 부상으로 전력외가 된 것도 이유지만 어쨌든 그냥 쉬고 싶었어."

_ 어디 부르는 데는 없나.

"없어. 그런데 충전은 좀 했어."

_ 김응용 삼성 고문,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이 1,000승 감독인데, 그런 욕심은 없는지.

"김영덕 전 빙그레 이글스 감독이 그런 목표를 가지라고 한 적이 있는데, 욕심은 별로 없어."

_ 대표팀 감독은 어떤가.

"부담이 너무 많아. 소집된 선수들이 부상 당하면 또 그렇고."

_ 감독 시절 신인을 잘 등용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있었는데.

"그건 아닌데…. 심정수 같은 경우도 신인으로 내가 키웠지. 이 선수는 1994년 입단해서 내야를 봤는데 잘 못했어. 내가 부임해서1995년 캠프 때 기회를 주려고 외야로 돌렸어. 그런데 연습 땐 되는데 시합 땐 안 되는 거야. 그래도 꾸준히 기다렸지. 내가 원래 지도 철학이 믿음이거든. 결국 한국 최고의 선수가 됐어. 2001년에 60억원짜리 연봉 대박까지 터뜨렸어. 그리곤 이 선수가 삼성 시절 내가 한화 감독할 때 찾아와 저녁 먹으며 아버지 얘기를 하는데 참 대견하데. 고교 때 아버지가 뇌경색이 왔는데 돈이 없어 병원 치료를 못 받았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이제 돈 벌어서 건물 지어 아버지께 드렸다고 하더구만."

_ '어록'이 많은 지도자로도 유명한데 가장 마음에 드는 것 하나만 골라 준다면.

"언론과 인터넷에서 어록이라고 나는데 솔직히 나는 그게 어록이라고 생각하고 한 얘기가 아니야. 나를 사랑해 주니까 그렇게 만들어 주는 것이지. 그래서 통 기억을 못해."

_ 뇌경색 후유증은 없는지.(김 감독은 2004년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일어나 한쪽 다리를 절면서 2006년 WBC 대표팀을 이끌었다)

"2004년 발병하고 처음에는 하루에 6시간씩 운동했어. 퇴원해서도 지금까지 1시간은 하지. 술 담배도 작파하고. 말은 진작에 돌아왔고, 걷는 것도 많이 좋아졌어."

_ 한국 프로야구가 올해 30주년에 관중 600만명 시대를 맞았다.

"강원 춘천고는 정말 유명한 야구 명문이었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공중분해돼 버렸지. 아마야구, 특히 고교야구가 위기야. 프로야구가 10구단 얘기까지 나오는데 지금처럼 50개 남짓한 고교야구팀으로는 도대체 선수 수급이 안 돼. 결국 프로가 도와줘야 해. 창단 때 지도자 월급이나 제반 비용을 대 줘야지. 고교 선수가 나와야 프로 선수도 나오는 것 아닌가."

_ 최 전 감독 빈소에서 야구인들이 아마야구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약속을 했는데.

"아마야구를 총괄하는 대한야구협회 강승규 회장이 나하고 김성근 감독을 보자마자 한국 야구 전체의 균형 발전을 위해 아마야구의 도약이 시급하다고 해서 전적으로 동의하고 도와주기로 했어."

_ 최 전 감독도 생전에 아마야구 육성에 관심이 컸나.

"지난해 MBC ESPN에서 방송한 야구 꿈나무 발굴 육성 프로그램 '날려라 홈런왕'에서 감독을 했지. 사람이 착해서 애들 참 좋아하더라고."

_ 팬들에게 한 말씀 하신다면.

"늙으면 고마움을 안다고들 하는데 요즘 내가 그래. 바깥에 나가면 알아보고 '복귀는 언제 하느냐'고 묻는 분들이 고맙고, 프로야구를 이렇게 사랑해 주시는 분들이 고마워. 그래서 나도, 우리 프로야구도 참 책임이 큰 거지."

선임기자 leeeunho@hk.co.kr

■ 김인식은 누구

김인식 전 감독은 현역 선수로도 유명했지만 그보다는 감독으로서 더 크게 성공한 야구인이다.

1947년 서울 출신인 그는 배문고에서 투수로 발군의 실력을 과시하며 실업야구 한일은행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불의의 어깨 부상을 당한 후 조기에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배문고 상문고 동국대 감독을 거치면서 지도력을 인정받은 그는 1986년 해태 타이거즈 수석코치로 프로야구 지도자가 됐다. 1990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창단 감독으로 감독 데뷔했고 1995년 OB 베어스의 사령탑을 맡아 그 해와 2001년 두 차례 팀을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려놓았다. 2005~2009년 한화 이글스의 감독을 맡았고 2010년까지 한화 이글스 고문을 지냈다.

국민들이 그를 잊지 못하는 것은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김인식’으로서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대표팀을 맡아 금메달을 따냈고,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는 4강 진출이라는 성적을 거뒀다. 같은 해 한화 이글스도 한국 시리즈 준우승으로 이끈 뛰어난 지도력으로 그는 시즌 종료 후 한화와 역대 감독 최고 연봉인 14억원에 재계약을 했다. 2006년 WBC 이후 다시는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다른 감독 후보들이 고사하는 바람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2009년 WBC 대표팀 감독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준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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