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라/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아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1980년 5ㆍ18민주화운동과 10ㆍ27법난을 겪은 직후인 이듬해 1월, 퇴옹(退翁) 성철(性徹ㆍ1912~1993) 스님이 조계종 제6대 종정으로 취임하며 내린 법어다.
성철 스님은 그 후 철저히 현실정치와 거리를 두었다. 어떤 법문에서도 현실정치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고 그를 만나고 싶어하는 정치인에게는 먼저 해인사 대웅전에서 3,000배부터 할 것을 주문했다. 물론 대부분이 포기했다. 대중과 접촉도 제한했다. 일부에서는 이를 두고 "현실도피 은둔"이라며 비판한다. 성철 스님은 정말 세상과 소통을 거부했던 것일까.
성철 스님 탄생 100주년(2012년)을 앞두고 '현대 한국사회와 퇴옹 성철'을 주제로 23일 열리는 제3차 학술포럼에서 성철 스님이 '사회적 은둔자'로 비치게 된 배경과 그의 본뜻을 집중 조명한다.
김성철 동국대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교수는 미리 배포한 기조 발제문에서 "1970~80년대 정치 혹한기에 김수환 추기경이나 문익환 목사, 지선 진관 스님 등은 현실정치에 적극 관여했지만, 성철 스님은 은둔적 행동과 비현실적 법어로 이를 백안시했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성철 스님이 1964년 서울 도선사에서 평생의 도반이었던 청담 스님과 함께 다짐한 서원문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서원문 내용은 '항상 산간벽지의 가람과 난야(蘭若ㆍ절)에 지내고, 도시 촌락의 사원과 속가(俗家)에 주석(主席)하지 않는다. 항상 고불고조(古佛古祖ㆍ옛 큰 스님들)의 유법(遺法ㆍ남긴 법)과 청규(淸規ㆍ선종에서 지켜야 할 규칙)를 시법 역행하고 일체의 공직과 집회와 회의에 참여하지 않는다. 항상 불조유훈(佛祖遺訓)의 앙양에 전력해 어떤 일에도 발언이나 간여하지 않는다'는 등 세 가지였다. 김 교수는 이를 토대로 "성철 스님은 당시 한국의 출가자가 해야 할 일은 '섣부른 사회 참여'가 아니라 '불교의 본질 회복'이라고 판단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조선의 억불정책 탓에 산으로 들어간 한국불교가 구한말 이후 다시 백성들 생활 속으로 들어왔지만 해방 이후 스님의 지위나 불교의 위상이 땅에 떨어져 기독교는 '선진 종교', 불교는 '낡은 종교'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성철 스님은 이런 인식을 타파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 것이다.
김 교수는 특히 불교는 가르침을 통해 하부구조를 바꿔야 세력이 확장되는데, 성철 스님은 이를 간파해 수행자로서 본분을 오롯이 지킴으로써 승가의 위상을 회복하고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에게 불교를 전하고자 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철 스님 같은 큰 스님이 산중의 사찰을 지키지 않았다면 한국불교는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권대익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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