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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칼럼] 그래도 정당밖엔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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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칼럼] 그래도 정당밖엔 길이 없다

입력
2011.09.2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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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때는 먼저 움직이면 지게 돼 있었다. 무기의 비약적 발달에도 전술은 나폴레옹 식 그대로였다. 포격 후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들판을 질러 돌격하는 식이었다. 당연히 참호에서 기다린 상대의 집중사격에 고스란히 노출됐다. 단 4개월에 100만 사상자를 낸 솜므전투의 비극도 이런 대량학살적 전투방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달려오는 적을 봐가며 사격한 병사는 20%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 참호에 머리를 박은 채 손만 올려 쏘거나, 아예 눈 감고 방아쇠만 당겼던 것이다. 차마 사람을 똑바로 보며 쏠 수 없던 심리적 이유가 가장 컸다. 현대의 전쟁후증후군 원인도 마찬가지다.

가상정치에 우롱당하는 정당들

그러나 엄청난 화력으로 훨씬 큰 살상효과를 내는 포병이나 전투조종사들이 같은 스트레스를 겪는 경우는 드물다. 직접 적을 보지 않으므로 인명살상의 실감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현대전이 게임처럼 느껴지는 것도 접적(接敵)기회를 줄이는 원ㆍ장거리 타격무기들로 전장의 현실감이 무뎌진 때문이다. 그래서 전쟁 결정이 쉬워져 대량살상 위험이 갈수록 커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다.

뜬금없는 전쟁 얘기는 개인적으로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우리 정치현실이 겹쳐 떠올라서다. 정치가 구체적 삶과 너무 멀리 유리돼 국민의 절박한 요구나 정서와 상관없이 늘 저들만 따로 겉도는 현실이다. 정치가 대중의 구체적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니 그들만의 비현실 세계에 갇혀 매번 헛발질이나 해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멀리 거스를 것도 없다. 당장 최근만 해도 성추행발언 의원 제명안 처리, 안철수현상에 대한 냉소적ㆍ자의적 평가, 대법원장과 헌법재판관 표결 등에서 줄줄이 보여진 정치권의 행태는 정치와 일반대중의 거리가 이미 시계(視界) 저 너머로 멀어져 있는 현실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너무 많은 논의로 벌써 진부해진 안철수 현상이란 것도 국민이 도저히 접촉감을 느낄 수 없는 원거리 정치에 대한 환멸의 반영이다.

소(小)대선 격인 서울시장 선거에서 기존 정당정치에 전혀 기반을 두지 않은 두 시민사회운동가들의 대결구도만 유독 부각되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정치 초보인 시민운동가들이 각기 겁 없이 범여ㆍ범야권 후보를 자임하며 출마선언하는 모습이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더욱이 거대 정통정당들이 그들에게 파트너 자격을 초라하게 구걸하는 모습은 차라리 연민의 정까지 불러일으킨다. 대중이 그들 운동가에게 거는 막연한 기대감의 근거는 다른 게 아니다. 오랫동안 실제현실의 한복판에서 치열하게 부대껴온 삶의 궤적, 오직 그것이다.

그러나 정치권의 업보긴 해도 정치, 좁게는 정당시스템 전체가 검증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몇몇 사회명망가들에게 이토록 휘둘리는 모습은 전혀 정상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민주적 대의정치의 근간이 정당정치임은 새삼 말할 필요조차 없는 원론이다. 대중의 이해를 집약, 표출하고 정부를 조직, 통제하며 사회갈등을 조정하는 정당의 역할에 대해선 지금까지 그 어떤 다른 대안도 발견된 바 없다.

그런 점에서 안철수 박원순 이석연 현상은 정치에서 배제된 데 절망한 대중이 만들어낸 가상(假想)의 정치현실에 가깝다. 그들이 어떤 변화와 성취를 이루어내든 결국 현실 정당정치의 틀 안으로 수렴되지 않으면 한낱 뜬 구름 같은 판타지로 끝날 개연성이 크다. 성공한 그들을 끌어들이거나, 혹은 실패해도 그들에게 걸었던 대중의 기대를 기존 정당정치 구조에서 재조직해내는 일 또한 현실정당의 몫임은 물론이다.

현실감각 회복에 존폐 달렸다

그러므로 앞으로 모든 논의의 핵심은 정당의 개혁이다. 충원구조를 바꾸든 의사 수렴 및 결정시스템을 바꾸든, 국민과의 거리를 좁혀 구체적 삶의 감각을 회복하지 않는 한 전통정당들의 미래는 없다. 자신들이 어떻게 국민들에게 상처와 박탈감을 주고 있는지도 인식 못한 채 멀찌감치서 낡은 정파게임에나 여전히 몰두해 있는 모양을 보면 그저 한숨만 나온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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