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렌즈로 붓질해 낸 성스러운 빛…시대의 진실도 문명의 흔적도 말하지 않았다
삼라만상의 가없는 변화가 한 컷의 순간으로 응결되는 필름의 감광(感光)층은 서양의 미술언어가 발화하는 공간이었다. 안셀 애덤스의 고전주의 사진이든 신디 셔먼의 포스트모더니즘이든, 감광층의 은(銀)화합물이 빛에 반응해 탄생한 또 다른 빛의 세계는 번역의 경계 너머에서 펼쳐졌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서양 식자들이 필름에 새겨진 한국의 언어, 한국인의 사진 준법(皴法)을 자기네 말로 번역하고 있다. 허연 여백 위에 꿈틀대듯 휘어 뻗은 소나무가 그것이다. 수묵이되 전통 수묵화에선 찾기 힘든 압축된 조형미로 한껏 긴장된 소나무. 유럽의 유명 컬렉터들이, 한국의 내로라하는 부자들이 꼭 하나 갖고 싶어 하는 안강송이다. 배병우, 1950년생 여수 출신 사내의 사진이다.
"소나무만 찍어도 삶이 짧다"
지난 7일 배병우를 만나기 위해 경남 함양으로 갔다. 그의 집은 서울 이촌동, 작업실은 경기 파주시 헤이리에 있지만, 사진을 찍는 그를 보기 위해선 기름값을 적잖이 써야 했다. 그는 문화유산 보호단체 아름지기의 부탁으로 천연기념물 은행나무를 찍으러 함양에 내려와 있었다. 이런저런 비슷한 이유로, 아니 별 이유가 없어도 배병우는 습관처럼 사진을 찍기 위해 1년 중 3분의 2는 집을 떠나 있다. "이제 하고 싶은 일 맘껏 하기 위해 그저께 직장(서울예대 교수)에도 사표를 냈다"는 육십 줄의 사진가는 '사진은 손이 아니라 발로 찍는다'는 원칙에 아직 충실했다.
그런 배병우에게 소나무는 일종의 "상징"이다. 그가 소나무를 찍기 시작한 것은 1984년. 올해로 28년째 쉬지 않고 같은 주제를 파고 있는 것은 소나무가 한국의 자연을 상징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배병우에게 있어 소나무는 소재라기보다 주제, 그 주제를 다루는 태도 자체다. 어디서 찍었냐보다 왜 찍었냐가, 또 얼마나 찍었냐는 물음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는 90세에 죽으며 "10년만 더 살면 훌륭한 화가가 될 텐데" 하고 탄식했다는 일본 에도 시대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ㆍ1760~1849)를 멘토로 여긴다고 말했다.
"후지산을 배경으로 파도 치는 바다를 표현한 우키요에가 일본을 상징하는 것처럼 한국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무얼까 고민했어요. 핵심적인 상징을 통해 모든 것을 표현하는 길을 찾아 헤맸죠. 그런 탐색 과정에서 동해바다 낙산사 소나무를 찍는데 순간적으로 느낌이 왔어요. '아, 이거다' 하는. 처음 2년 정도는 1년에 10만km씩 소나무를 찍으러 다니면서도 스스로 도취해 힘든 줄도 몰랐어요."
일로매진, 이후 배병우는 쉬지 않고 소나무를 찍었다. 소나무와 관련된 역사, 문학, 그림, 민속도 샅샅이 훑었다. 머릿속에 맴도는 상징이 제대로 사진으로 표현돼 나오는 데만 꼬박 10년이 걸렸다. 바다와 제주 오름 등 다른 주제의 작업도 계속했지만 한 번도 소나무를 쉬지 않았다. 그 결과 그저 구불구불하고 나약한 존재로 여겨지던 한국의 소나무를 서양인들의 머릿속에 '성스러운 숲(sacred wood)'로 자리잡도록 만든 사진들을 찍어낼 수 있었다.
로맨티스트의 '마이 웨이'
배병우의 사진이 처음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술성에 대한 시비, 아니 무시가 많았다. 그가 소나무를 찍기 시작하던 1980년대 세계 사진계는 개념 미술의 범주에 드는 연출된 사진, 이른바 스테이지드 포토(staged photo)가 대세였다. 새로운 실험과 충격으로 가득한 시기에 자연을 스트레이트하게 표현하는 배병우의 사진은 시대에 동떨어진 낭만주의의 잔재로 취급 받았다.
"추상 사진이 휩쓸던 1988년, 독일 빌레펠트대에 연구 교수로 갔다가 완전히 바보 취급을 받은 적도 있어요. 케케묵은 로맨티스트라고. 지금은 지구 온난화 등으로 자연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오히려 내 사진이 각광받고 있는 것 같아요. 내 제자라면 다 유학을 받아줄 정도니까."
그 80년대는 한국에서 예술이 사회 변혁을 위한 도구로 인식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배병우의 사진은 올드 스타일을 넘어 반동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트루쓰(진실)보다 뷰티(아름다움)에 더 관심을 갖는" 배병우의 스타일은 변하지 않았다. 그는 시대의 아픔은커녕 인간 또는 문명의 흔적조차 깡그리 지워버리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는 직설화법으로 얘기했다. "나는 비겁한 사람이라서 그랬다"고.
"내가 젊은 시절 참 어렵게 살았어요. 최민식 선생님의 사진처럼 그걸 정면으로 응시하는 게 옳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난 그런 사진 작업이 가뜩이나 힘든 사람들을 더 괴롭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찍는 사람은 인간의 현실을 담는다고 생각하겠지만, 내 양심으로는 그걸 쳐다보고 기록하는 게 오히려 정당하지 못한 일 같더라고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빛으로 피워낸 치유의 숲
배병우의 이름을 유명하게 만든 사진은 경주 남산의 신라 왕릉을 감싼 소나무들이다. 부드러운 비단 같은 아침 햇살, 혹은 농염한 여인의 연지 같은 노을이 굽은 소나무를 감싼 모습이 한국인에게는 더할 수 없는 푸근함, 외국인들에게는 낯선 신비에 대한 시각적 체험을 선사했다. 역광을 이용한 실루엣은 동양화의 붓질이 렌즈와 필름이란 도구로도 가능함을 보여줬다. 또 과감히 우듬지를 잘라내는 배병우 특유의 조형적 기법은 하늘로 솟구치려는 상승의 에너지를 보는 이의 가슴 속으로 옮겨놓는 마법을 부렸다.
배병우는 그러나, 이런 기법적 완성을 "사기"라고 낮추잡았다.
"소나무를 실제로 보니까 사진처럼 신비롭지 않다는 거 알겠죠? 최근작 중에 유명한 게 2006년 여기 함양 바로 요 앞 동네에서 찍어서 지금 리움미술관에 있는 건데, 그것도 딱 5분 동안 새벽 안개가 끼어서 뒤의 지저분한 배경을 가려줘서 그런 사진이 나온 거예요. 다 사기지 뭐."
배병우의 이런 말투는 위악과는 거리가 있다. 그건 "이발소 그림 같다"는 비판에 "낭만주의가 본래 이발소 그림"이라고 맞장구 치는 것과도 맥이 닿을 것이다. 그는 매일같이 20kg에 육박하는 카메라 가방을 메고 새벽 일출 시간에 맞춰 숲으로 간다. 곁에서 본 그 행위는 '사기'와 '이발소'라 말을 해도 기실은 사진을 보는 사람을 위한 예술적 치유의 행위로 읽혔다. 그는 한두 컷이 아니라 메뉴판(사진집을 그렇게 표현했다) 전체를 보고 사진가를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누구나 진지하게 내 메뉴를 보고 나면 내가 진짜 뭘 하고 사는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내가 달력 사진도 매년 만드는데, 그런 작업도 무시할 게 못 돼요. 사람들이 그 달력의 사진이라도 보고 세상을 보는 눈에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긴다면 그걸로 의미 있는 일 아닐까요?"
함양·거창=글·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 배병우의 사진은…
"여기, 오직 소나무에 둘러싸인 이곳엔 어떠한 고매한 시점이란 없다. 여기엔 또한 세계를 그린 그림이란 없다. 오직 시야를 벗어나지 않는 덤불과 수풀, 나무와 높은 숲, 땅만 보인다. 그러나 오히려 그 안에서 길을 잃는다. 사진 이미지에서조차, 소나무는 평가하는 눈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재생산이며 상징이다. 기반이며, 은신처, 원상이며 잔상이다. 그것은 실재이며 그리움이다."(토마스 바그너ㆍ미술평론가)
"무심한 듯 바라보지만 기꺼이 하나 될 의지를 가지고 있고 이미 하나인 듯하지만 담박함을 잃지 않은 부성애적 풍경이 그의 사진에 담겨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진이 닿는 곳은 거기가 어디이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장이 된다. 그가 품어준 세상에 감사하며 내 안에서 살아 숨쉬는 무위자연에 빠져볼 일이다."(신수진ㆍ연세대 교수)
"그의 뷰파인더는 풍경을 토막으로 끊어내지 않고 오히려 풍경이 그 안으로 흘러들어와서 새 자리를 잡게 하는데, 이때 세상을 바라보는 자의 내면은 외계의 사물과 행복한 교섭을 이룬다… 나는 과거를 유효하게 포함하는 현재의 시간을, 그리고 현재가 살아있는 미래의 시간을 나의 모국어로 묘사하고 싶었다. 내가 이루지 못한 소망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배병우의 화면을 읽으면서 나는 안다."(김훈ㆍ소설가)
"그의 풍경 이미지를 보는 주체는 작가와 심정적인 공감대를 갖게 되어 마치 작가는 동양적 산수화가 시도하였던 합일의 경지를 꾀하는 듯하다… 이제 그의 사진은 역사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미지를 통하여 문명에 가려진 자연의 초월적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배병우 특유의 소통 방식이다."(박영란ㆍ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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