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B 출신답게 음지에서 일하는 게 더 적성에 맞아서일까.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가 내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고 막후에서 상왕(上王) 역할을 계속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푸틴이 대선에 불출마할 경우,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그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는 명실불부(名實不符)의 리더십이 계속될 전망이다.
20일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 여당 관계자 발언을 인용해 푸틴이 내년 3월 대선에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푸틴의 자문위원인 미하일 비노그라도프는 "푸틴은 대통령이나 총리 같은 공식직함 없이 통치하려는 권리를 강화하고 있다"며 "그렇게 되면 공식 지도자로서 직면할 수 있는 문제를 피하면서 권력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푸틴과 메드베데프는 아직 출마 여부를 공식적으로 밝히지 않았지만, 한 사람이 출마할 경우 다른 사람은 자동 포기하기로 했기 때문에 푸틴의 이 같은 결심은 메드베데프의 재선을 용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푸틴은 대중적 인기가 높아 출마만 하면 당선은 떼어 놓은 당상이기 때문에, 불출마 결정은 메드베데프를 전면에 앞세워 국가 대사를 좌지우지하는 현재의 구도가 통치에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높다.
결국 3선연임 제한 규정에 걸려 2008년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직을 이양한 후 실권을 휘둘러 온 푸틴이 이제는 굳이 총리를 맡지 않더라도 메드베데프를 막후에서 조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확보했다는 것. 실제로 푸틴은 5월 한국으로 치면 '푸사모'에 해당하는 외곽 정치단체 나로드니(인민) 전선을 구성해 비공식 영향력을 행사할 준비를 마친 상태다.
그러나 3년 전에는 풋내기였겠지만 그간 나름의 입지를 구축해 온 메드베데프가 집권 2기에도 묵묵히 아바타 역할에만 만족할지는 미지수다. 실제 두 사람은 유독 외교정책 분야에서 수차례 불협화음을 노출했는데, 서방의 리비아 공습을 '십자군 원정'에 빗대 비난한 푸탄의 발언을 메드베데프가 에둘러 비판한 것이 그 대표적 예다. 이 때문에 메드베데프 진영에서는 둘 중 하나만 출마하자는 약속을 깨고 독자출마를 선언해야 한다는 강경론이 나오기도 했다.
메드베데프가 권위적인 푸틴에 비해 유연하고 친서방 성향이지만 그가 명목상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한다고 해서 러시아 정부의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에 큰 변화가 올 가능성은 낮다. 상황에 따라서는 푸틴이 수렴청정 계획을 뒤집고 직접 전면에 나서는 선택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전직 하원(두마) 의원인 블라디미르 리지코프는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푸틴이나 메드베데프 사이에는 차이가 없어 누가 되든 전혀 상관이 없다"며 "(메드베데프 2기도) 부패하고 반인권적 정권이 될 것"이라 전망했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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