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출범 30년이 지나면서 '전설'이라 불리던 투수가 이른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고(故) 최동원 전 한화 2군 감독 이야기이다. 10대 후반부터 뛰어난 실력으로 고교야구를 평정한 뒤 연세대를 거친 고인은 숱한 기록을 남겼다. 실업야구 데뷔 첫 해 최우수선수상, 신인왕, 다승왕까지 싹쓸이하는 등 최고투수로서 이름을 날렸다.
특히 1984년 프로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을 작성했다.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그는 혼자 4승을 올려 롯데의 첫 우승을 이끌어냈다. 그 중 세 차례나 완투승을 기록해 부산 팬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약간의 거만한 얼굴로, 안경 너머로 타자를 바라보며 상대를 윽박지르는 강속구를 던지던 그의 모습은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고 한다.
나는 야구팬이다. 롯데를 좋아한다. 화끈해서 좋다. 이대호, 홍성흔, 강민호 등 강타자들이 시원스럽게 타격하는 모습을 보면 통쾌하다. '최고투수' 최동원의 경기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알게 되면서 '화끈한 투수'였음을 느끼게 된다. 마음 한구석에 '좋아하는 선수'로 남아 있었는데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됐다.
고 최동원 감독은 '최고선수'였지만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1988년 프로야구선수회 창립을 주도하다 구단의 미움을 샀고, 결국 삼성으로 '보복성' 트레이드를 당했다. 야구에 흥미를 잃은 탓인지 삼성에선 두드러진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32세로 은퇴한 뒤에는 오랫동안 야구와 동떨어진 삶을 살기도 했지만 마음속엔 언제나 야구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는 2001년 야구계로 복귀해 2006년부터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을 맡았던 3년을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남다른 야구 열정으로 투병 중에도 야구중계를 놓치지 않고 지켜봤던 고인을 기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최근 야구팬들은 '최고투수' 최동원에 앞서 '타격 기계'란 별명으로 불렸던 '최고타자' 장효조마저 저 세상으로 보냈다.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는 선수들은 남녀노소 모두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 기쁨도 준다. 그들의 이야기가 '전설'이 돼도 마찬가지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사이영상', 일본 프로야구에서 '사와무라상'을 만들어 최고투수에게 시상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한국야구 투타의 '큰 별' 최동원과 장효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상'을 만드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사업이 될 것이다. 아버지 또래인 50대에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고인들이 남긴 발자취가 크고도 귀한 만큼 '상' 제정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길 바란다.
이경근(서울 중동고 1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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