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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이의 생일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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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아이의 생일카드

입력
2011.09.19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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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서 생일카드를 받았다. 봉투를 열어보니 꼬깃꼬깃 접은 작은 편지지가 있었다. 연필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편지의 내용은 지금까진 늘 고만고만했다.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특히 마지막 한 줄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아빠, 오래오래 사세요.'

이건 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복잡 미묘한 기분이었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얼마 전 일이 떠올랐다. 몸살로 앓아 누워 꼼짝도 못하고 있는데 아이가 내게 다가와 아주 걱정스런 표정으로 했던 말.

"아빠, 아프면 안돼..""괜찮아. 아빠가 아프니까 걱정되니?""응.. 아빠 아프면 돈 못 벌어 오잖아..""..."

그 때 표정이 아마 이번 생일카드 때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아이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나는 차마 아이에게 '왜 아빠가 오래 살았으면 좋겠니' 하고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눈치 없이 또 너무 솔직한 대답이 돌아올까 사실 무서웠다. 아무리 철부지 아이의 말이라고 해도 서운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엔 좀 다르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럼 아빠가 몇 살까지 살았으면 좋겠어?""응, 아주 오래오래..내가 아빠 나이 될 때까지..""..."

그럼 고작 70이다. 대한민국 남성의 평균수명도 안 되는 나이다. 그러고 보니 얼마 남지도 않았다. 그래도 용기를 내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

"아빠가 늙으면 넌 어떻게 해줄 건데?""응, 내가 수영장하고 온천 딸린 집 지어 줄거야.""..."

아빠의 표정이 조금은 나아진 걸 눈치 챘는지 아이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아주 조금 서글픈 기분도 들었지만 모르는 새 아이도 많이 자랐구나 생각했다. 이젠 더 이상 아빠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거나 맹목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나이가 돼버렸다.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아이도 세상의 현실에 눈떠가고 있는 것이다. 30년 전 내가 지금 아이의 나이였을 때 내 아버지도 이런 기분이 드는 순간이 있었을까. 30년 후 아이가 지금의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세상은 과연 지금보다 나아질까. 부모들이 좀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것처럼 나도 어느새 거역할 수 없는 부모의 운명을 새삼 깨닫는다. 적어도 아이의 바람만큼은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내 아이는 수영장하고 온천이 딸린 집을 지어주겠다는 철부지 아이의 말에 그게 전세인지 월세인지 생각하는 부모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한중 EBS 지식채널e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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