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전 대통령이 최근 회고록에서 '1992년 대선 때 김영삼 당시 민자당 후보 측에 3,000억원을 지원했다'고 밝히면서 6공화국 비자금이 다시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인물이 바로 6공 황태자 박철언(69) 전 문화체육부 장관. 그의 수백억원대 돈을 둘러싼 몇 차례 송사로 "박 전 장관의 돈이 노 전 대통령 비자금의 일부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되는 상황이다.
현재까지 불거진 박 전 장관의 비자금 논란은 크게 두 갈래다. 우선 10년 동안 자신을 수행했던 강대신(46)씨를 절도와 횡령 혐의로 2001년 수원지검에 고소했던 일명 '마포 아방궁 사건'. 강씨는 91년 대학을 졸업하고 2000년까지 비서관으로 박 전 장관을 보좌한 핵심 측근이었다. 지금은 19대 총선 출마를 준비 중인 강씨는 '박 전 장관 소유의 마포 H오피스텔 집기와 개인 물건을 절도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당했었다. 강씨는 이와 관련 16일 기자와 만나 "97년 박 전 장관의 비자금을 관리하던 A보좌관이 미국으로 도망쳤고, 그가 빼돌린 비자금 100억원 가운데 12억원을 회수한 공로로 오피스텔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강씨는 1심 재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2심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풀려났다.
그런데 이 과정에 박 전 장관의 비자금 관리 장부 논란이 일었다. 강씨는 "박 전 장관이 찾으려 했던 '개인 물건'은 비자금 장부였다"며 "나중에 알아보니 박 전 장관의 이사를 도운 친구가 검은색 노트 10여권을 보관하고 있어 재판 도중 돌려줬다"고 말했다.
박 전 장관은 이 장부가 비망록이라고 주장하나 문제의 장부가 노태우 비자금과 관련이 있다는 의혹도 있다. 당시 재판에서 박 전 장관은 "(비망록에는) 금전투자신탁계약서, 바뀐 통장, 옛날 서류 등이 들어 있었고 그것들이 40억원이라고 들었다"며 "비자금은 없었고 (측근들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자금을 일시 관리시킨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강씨는 "'내 돈이 아니고 윗분(노 전 대통령) 돈이기 때문에 꼭 회수해야 한다'고 박 전 장관이 말하곤 했다"며 "박 전 장관은 노태우 정부 시절 정무장관으로 야당에 정치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고, 정권 창출에 기여한 월계수회 운영을 맡고 있어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지원 받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박 전 장관의 또 다른 비자금 논란은 서울 모 대학 무용학과 여교수 강모(50)씨와의 송사 때문에 불거졌다. 박 전 장관은 2008년 강 교수를 "관리를 부탁했던 돈을 인출해 178억여원을 빼돌렸다"며 경찰과 검찰에 고발하고 민사상 손해 배상 청구소송도 냈다. 박 전 장관에게 받은 자금을 은행에 입금하지 않고 은행 직원의 도움을 얻어 위조한 통장내역을 박 전 장관에게 보여주는 수법으로 돈을 가로챘다는 혐의다. 작년 말 법원은 강 교수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하고 통장 위·변조를 도운 은행과 연대해 160여억원을 배상하라고 확정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당시 사건에 깊이 연관된 박 전 장관 측근 B씨는 "박 전 장관은 차명계좌를 이용해 이자가 높은 장기 적금에 돈을 분산해서 집어넣는 방식으로 비자금을 불려왔다"며 "(강 교수 관리 비자금 등에 대해) 과거 검찰에 관련 자료를 넘기고 수사를 요청했으나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은 아직 진행형이다. 노 전 대통령은 1997년 2,629억여원의 추징금을 선고받고 전체 금액의 89.2%인 2,344억여원을 납부했지만 나머지 추징금을 납부하지는 않고 있다. 때문에 박 전 장관의 돈이 노태우 비자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추징이 불가피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의 모임 황희석 대변인은 "노태우 비자금은 국고 환수의 대상으로 아직 시효가 지나지 않았다"며 "늦었지만 비자금의 실체를 밝혀 추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박 전 장관은 기자와 만나 "차명계좌로 금융자산을 관리한 것은 잘못이지만 국세청에 신고해 세금을 완납했고 불법 정치자금은 절대 아니다"라고 밝혔다. 박 전 장관은 또 "내 재산의 1차 종잣돈은 자수성가하신 부모님의 유산이었고 내가 운영하던 북방정책연구소에 들어온 기업체 협찬금과 공직생활을 하면서 저축한 부분 등으로 자산을 불렸다"고 강조했다.
박 전 장관은 또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시기 나는 정치보복 대상 1호였고 국세청 검찰에서 이 잡듯이 내 주변을 뒤졌다"며 "만일 불법 비자금이 있었다면 왜 나를 못 잡아넣었겠느냐. 비자금이라는 것이 내가 감출 수 있는 게 아니고, 뒤져도 없으니까 슬롯머신으로 잡아 넣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김 전 대통령을 겨냥, "노 전 대통령은 3,000억원을 당이 아닌 김 전 대통령 개인에게 줬고, 나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회고록에 쓰지 않았다"며 "내가 김 전 대통령이라면 '그 당시에는 정치를 하다 보니 그렇게 돈을 받았는데 국민에게 죄송하다, 남은 것은 어떻게 되었다'하고 털어버릴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정현기자 joh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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