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발생한 사상 초유의 초가을 정전대란은 전력당국의 위기대응 능력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위기 발생시 체계적인 조치의 기준이 돼야 할 매뉴얼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고, 그러다 보니 매뉴얼 자체가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
지키지도 못할 낡은 매뉴얼
전력당국은 전기사업법에 근거를 둔 전력시장운영규칙과 함께 위기 시 대응 매뉴얼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위기대응 매뉴얼상의 순환정전기준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현행 매뉴얼상에는 예비전력이 100만㎾ 미만인 심각단계에서 순환정전조치를 취하게 되어 있는데, 15일 전력거래소측은 148만㎾에서 단전조치를 단행해 '매뉴얼 위배'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하지만 전력거래소측은 "예비전력이 경계단계(100만~200만㎾)로 급박하게 내려간 상황에서 만약 100만㎾ 이하로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그야말로 대규모 정전사태(블랙아웃)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매뉴얼을 어겼지만 불가피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김창섭 경원대 교수는 "전체적인 국가 전력수요가 늘어난 만큼 (이젠 몇 백만 ㎾가 아닌)'전력예비율 5%'식으로 정전기준을 새롭게 규정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예고 없는 정전
정전 피해가 유독 컸던 이유는 시민들에게 사전에 공지가 없었기 때문. 15일 순환정전은 오후 3시경(정확히는 3시11분)부터 시작됐지만 시민들에게 알려진 것은 1시간 반이 훨씬 지난 오후 4시57분이었다. 이 사이 시민들은 난데없는 정전에 어리둥절했고, 피해는 속출했다.
그 사이 오히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정전사실과 대응요령을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했다. 전력당국은 침묵하고, 시민들이 소식을 전하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한전은 이 모든 문제가 "갑작스런 상황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일반주택은 예고 없이 전력을 차단할 수 있지만 고층아파트와 상업업무용, 경공업 공단 등은 1~2시간 전에 예고를 해야 하는데 이 조차 지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갑작스런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 국민들에게 고지해야 하고, 그래야 엘리베이터 안에 갇히는 사고를 막을 수 있다는 게 일반적인 지적이다. 전력공급중단은 국가 재난에 해당하는 사안인 만큼, 태풍 지진 같은 자연재해처럼 즉각적으로 국민들에게 고지하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경제부 관계자는 "앞으로는 전력공급을 중단하게 될 때 무조건 사전 공지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호등까지 꺼야 했나
15일 정전은 무차별적으로 이뤄졌다. 일반 가정이나 사무실은 어쩔 수 없었다 해도, 병원 심지어 신호등까지 불이 나갔다. 뒤늦게 교통경찰이 투입돼 수신호로 차량통행을 정상화했지만 자칫 대형 교통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시민들은 "정전을 하더라도 생명을 다루는 병원이나 안전시설은 제외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원래 매뉴얼 상에는 국민경제에 미치는 피해와 공공이익 등을 고려해 부하조정(전력 공급 중단) 순위를 정해 놓고 있다. 예컨대 군대, 통신, 전철, 금융기관 본점, 종합병원은 정전조치 제외대상이다. 하지만 한전은 경찰서와 행정관서, 금융기관, 병원 등 시설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전기공급을 중단했다.
매뉴얼 자체에도 허점이 있다. 신호등의 경우 교통대란을 유발할 수 있음에도 전력 우선 공급대상에 빠져있다. 전기선로 상으로 신호등을 따로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전국 2,877곳의 교차로에서 신호등 작동이 중단돼 곳곳에서 아찔한 상황이 연출됐다.
양정대기자 torch@hk.co.kr
유환구기자 red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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