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만 하더라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과거 서유럽의 식민지배를 받거나 반식민지 상태로 제국주의의 수탈 대상이 됐던 나라들이 빚 수렁에 빠진 유럽을 구하겠다고 나섰다. 미국도 유럽 위기에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어서 이 방안이 현실화할 경우 세계경제 질서의 중심추가 급속히 신흥경제권으로 쏠릴 것으로 보인다.
귀도 만테가 브라질 재무장관은 13일 "BRICS가 다음 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 연례회의에서 유럽을 도울 방법을 논의한다"고 밝혔다. BRICS는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활용해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채권을 사들이는 등의 방안을 구체화할 계획이다.
실제로 BRICS가 유럽에 구제금융을 제공한다면 과거 식민국과 피식민국 사이의 갑을 관계가 180도 바뀌는 셈이 된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브라질이 재정위기에 빠진 과거 식민국을 돕고, 대영제국 지배를 받았던 인도와 남아공이 영국 채권을 사들이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19세기 독일, 프랑스, 포르투갈, 영국 등에 조차지를 제공했던 중국이 100여년 만에 유로존 존폐의 열쇠를 쥐게 된 것도 상전벽해다.
여력은 충분하다. 외환보유고 추이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유럽을 구한 미국처럼 BRICS는 충분히 '21세기판 마셜플랜'의 주역이 될 수 있다. 올해 7월까지 중국(3조1,975억달러), 러시아(5,339억달러), 브라질(3,461억달러), 인도(3,191억달러)의 외환보유고 합계는 4조866억달러. PIGS라는 이름으로 도매금 취급을 받는 포르투갈, 아일랜드,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의 정부부채 합계가 3조1,186억유로(4조2,537억달러)여서 이론상으론 BRICS의 여유자금만으로도 PIGS의 부채를 다 감당할 수 있다.
BRICS가 수렁에 빠진 유럽을 향해 손을 뻗은 이유는 뭘까. 미국의 마셜플랜이 자선사업이 아니었던 것처럼 BRICS의 행보에도 철저히 전략적 의도가 담겨 있다. 브라질 일간 발로르는 "BRICS가 세계 경제를 안정화하는데 자신들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유럽에 구제금융을 제공하는 상징적 행위를 발판 삼아 경제력에 비해 저평가된 정치적 위상을 제고하려 한다는 것이다. 과거 피식민국이 제국주의 국가의 소비시장이었던 것처럼, 신흥경제권이 유럽을 수출시장으로 삼고 있기에 유럽의 공멸은 BRICS 입장에서 결코 좋은 시나리오가 아니다.
BRICS가 구제금융을 대가로 미국이나 유럽에 줄기차게 요구해온 숙원사업을 현실화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14일 "세계무역기구(WTO)가 2016년에 중국의 시장경제 지위를 인정하기 전에 유럽이 먼저 인정해야 한다"고 한 것도 그런 차원이다. 또 유럽이 중국의 구제금융을 받는다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낙인찍으며 위안화 절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힘을 잃을 수 밖에 없다.
이영창기자 anti092@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