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의 공직 생활을 마치고 얼마 전 퇴직하신 아버지! 이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고맙습니다.”
가족애가 담긴 한 청년의 발언이 스피커를 통해 밖으로 흘러나온다. 주변에 모여 있던 생면부지의 사람들은 미소 지으며 손뼉을 친다. 공감과 소통의 순간이다.
청년의 발언대는 서울 청계광장에 들어선 가로ㆍ세로 2.6m, 높이 2.8m의 블랙 큐브. 내부의 마이크를 통해 누구나 20초간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이다. 안에서 보면 사방이 거울이지만, 누군가 큐브 안에 들어가면 전등이 자동으로 켜지면서 밖에서 내부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구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속내를 꺼내 보이려는 이들이 줄을 이었다.
다른 청년이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보험의 신입사원이 된 ○○○입니다. 그동안 가난하게 데이트하느라 고생 많았던 ○○야, 앞으로 더 잘해줄게. 사랑한다.” 또 한 번 떠들썩한 박수소리가 광장에 울렸다. 여고생들은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노래를 불렀고, 어떤 이는 통기타를 연주했고, 또 다른 이는 시국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7일 오후 청계광장의 풍경이다.
청계광장에 설치된 여러 조형물에 비해 큐브의 외관은 단순하다. 그냥 지나칠 법하지만 그곳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상기된 목소리에 행인들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다. 큐브 주위로 모여든 시민들은, 140자로 자신의 생각을 축약해 전달하는 트위터처럼 단 20초의 발언시간을 주는‘말하는 트위터’를 흥미로워했다.
이 설치물은 작가 양수인(미국 콜롬비아대 건축대학원 겸임교수)씨의 작품 ‘있잖아요…’다. 국립현대미술관, 소마미술관, 아르코미술관이 공동 주최한 공공 프로젝트 ‘뮤지엄 링크’의 일환으로, 이날 청계광장에 공개됐다.
이들 3개 미술관은 ‘미술과 대중, 도시의 소통’을 주제로 청계천 공공전시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세 명의 작가가 경합을 벌여 선정된 작품이 양씨의 ‘있잖아요…’다.
누구나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된 작은 공간은 소통 부재로 진통 중인 한국 사회에 작지 않은 메시지를 던진다. “서울역 광장이 1970~80년대 시민 발언의 공간이었다면, 2000년대에는 청계광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듯했다. 하지만 서울역 광장은 상업적인 공간이 됐고, 청계광장에는 1년 내내 행사가 잡혀, 집회할 수 없는 폐쇄적인 장소로 변해갔다.” 양씨는 “‘있잖아요…’를 통해 광장의 본래 의미를 조금이라도 회복시키고 싶었다”고 작품 취지를 설명했다.
마이크를 잡았던 발언자들이 자리를 떠난 뒤에도 그들 목소리는 큐브에 남아 녹음된 순서대로 광장에서 반복 재생된다. 큐브는 10월 23일까지 매일 정오부터 오후 9시까지 작동한다.
3개 미술관은 각기 기획전시도 연다. 아르코미술관은 15일부터 10월30일까지 회화, 설치, 미디어아트 작가 20명의 기획전 ‘몹쓸 낭만주의’, 소마미술관은 9일부터 11월20일까지 ‘조각가의 드로잉’전을 연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는 10월 17일부터 국내외 미디어작가 4명의 기획전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열린다.
이인선 기자 kell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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