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 카스트로, 호치민, 트로츠키, 레닌, 엥겔스, 마르크스, 룰라…. 이들의 공통점은? 좌파다. 그것 말고 또 다른 공통점은? 덥수룩한 수염이다. 이를 단순하게 엮으면, ‘수염 기른 이는 좌파’라는 등식이 나온다. 그런 추론이 나올 만한 역사적 배경은 있다. 19세기 초 유럽 근대사회에서는 시민들이 수염을 깎지 않는 것으로 저항의 뜻을 내비쳤다. 그래서 19세기 초 독일의 몇몇 공국은 수염 기르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카스트로는 수염을 깎지 않는 이유에 대해 “면도하는 시간을 혁명 구상에 쓰기 위해”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렇다고 수염이 꼭 좌파적 이미지로만 투영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권위의 상징으로 여겨진 경우가 더 많다. 링컨 대통령은 주걱턱, 광대뼈 등 못생긴 얼굴을 가려보라는 그레이스 베델이라는 소녀의 편지를 받고 수염을 기르기 시작, 대통령에 당선됐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끝이 치켜 올라간 8자 수염으로 유명했고, 히틀러나 스탈린은 뭉툭한 콧수염을 길렀다. 우리나라 국조 단군, 그리스 신화의 남성신, 성서의 모세 모두 긴 수염으로 묘사됐다. 삼국지의 관우는 수염을 비단보자기에 싸서 보호했으며 미염공(美髥公)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시대가 변해 덥수룩한 수염의 의미도 달라졌다. 권위나 이데올로기보다는 서민적 풍모, 결연한 의지, 강인함 등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자주 쓰이는 듯하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패배한 앨 고어가 이듬해 수염을 기르고 워싱턴 정가에 나타나 화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지나치게 깔끔한 엘리트 이미지를 지우고 소탈한 이웃집 아저씨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우리 정치권에서도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몇 년 전 민생탐방을 할 때 수염을 깎지 않아 뉴스가 된 적이 있다. 손 대표는 그 이유에 대해 “민심의 하늘을 이고 다니기 위해”라고 답했다.
■가장 최근에 수염으로 이목을 집중시킨 이는 박원순 변호사다. 그는 안철수 씨와의 서울시장 후보단일화 기자회견장에 평소의 단아한 선비 스타일과는 달리 털북숭이의 야성적인 모습으로 나타났다. 7월 19일 백두대간 종주에 나섰다가 기자회견 전 날인 5일 돌아왔지만 결연한 의지, 강한 이미지를 보여주려고 면도도 하지 않고 나왔던 모양이다. 함께 종주했던 사람들 중 수염이 가장 많이 자랐다니, 남성적인 면모가 숨겨져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시민사회운동의 선구자가 수염으로 이미지 관리를 하는 것은 그답지 않다는 느낌도 든다. 7일 열린 이소선 여사 영결식에는 수염을 깎고 참석했다.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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