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55) 변호사는 시민사회 운동의 대부다. 자연 '진보 계열'인사로 분류된다. 요즘 들어 그는 스스로를 '소셜 디자이너'(사회를 아름답게 바꾸는 사람)라고 부른다.
박 변호사는 호칭이 많기로 유명하다. '변호사' 또는 '처장'(참여연대 사무처장) '이사'(희망제작소 상임이사)라고 불리고, 지인들은 '여러 문제 연구소 소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만큼 다양한 시민사회 단체에 참여하면서 광폭 행보를 해 왔다.
때문에 그는 그간 정치권의 영입 1순위였지만 매번 고사했었다. 그러다 올 5월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정치를 할 의향에 대해 "세상의 좋은 변화를 만드는 게 내 목표"라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경남 창녕 태생인 박 변호사의 '진보 이력'은 대학 1학년 때인 1975년 시작됐다. 서울대 법대 1학년 당시 유신 반대 집회에 참가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감되면서 제적 당했다. 이후 단국대 사학과로 학적을 옮겨 졸업한 뒤 1980년 사시(22회)에 합격했고, 대구지검에서 1년 남짓 검사 생활을 하다가 인권 변호사로 변신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권인숙 성고문 사건, 말지(誌) 보도지침 사건,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 등 굵직한 시국 사건을 다루는 법정에선 어김 없이 모습을 보였다.
그는 90년대 초 런던 정경대(LSEㆍ국제법 디플로마)와 하버드대 법대(객원 연구원)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한 뒤 94년 참여연대 창립 멤버로 참여했다. 10년 동안 참여연대에서 활동하면서 정치인 낙선ㆍ낙천 운동과 소액주주 권리 찾기 운동,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등을 주도했다. 그 과정에서 투쟁 일변도에서 벗어나 대안을 제시하는 시민운동을 전개했다는 평가도 받았다. 2003년엔 아름다운재단을 만들어 기부문화 확산 운동을 펼쳤고, 2007년엔 정치사회 분야 민간 싱크탱크인 희망제작소를 만들었다. 2004년엔 포스코와 풀무원의 사외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박 변호사는 사회발전 모델에 대해 "20세기형 토건 사업이 아닌 창조와 혁신, 문화와 예술, 시민단체와의 파트너십 등을 존중하는 세상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런 정부 하에서 (내가) 너무 잘 나가면 그것도 이상한 게 아니냐"며 현정부를 에둘러 비판하기도 했다.
김기식 전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등 야권통합모임인 '혁신과 통합'의 일부 인사들과 시민사회 운동가들이 박 변호사의 지원군이다. 박 변호사 영입을 위해 공을 들인 손학규 민주당 대표와 고교 선후배 사이로 친분이 두텁다.
그는 "내 꿈은 과로사"라고 말할 정도로 일 욕심이 남다르다고 한다. 한 측근은 박 변호사에 대해 "술 안마시고 노는 것 싫어하고 잠이 없는 워커홀릭(workaholic)"이라고 말했다.
최문선기자 moonsu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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