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 만경봉호는 우리에게 재일동포 북송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러나 재일동포 북송에 처음부터 만경봉호가 동원됐던 것은 아니다. 1959년 12월 14일 니카타항에서 재일동포 북송 제 1진 234세대 975명을 태우고 북한 청진항으로 향한 배는 클리리온호와 토보르스크호 등 소련 선박 두 척이었다. 재일동포 북송사업은 1960년 4만9,036명, 1961년 2만2,001명으로 정점을 이뤘고, 그 후엔 급격히 감소했다. 북한의 3대 세습후계자인 김정은의 생모 고영희도 13세 때인 1961년 아버지와 함께 북송선을 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만경봉호가 니카타-원산항 노선에 처음 취항한 해는 1971년. 지원자 급감으로 북송사업이 많이 시들해진 시기다. 그래서 주된 용도는 북송사업보다는 재일동포 고향방문 사업과 화물 운송으로 바뀌었다. 1984년 중단되기까지 총 9만3,340명(일본인 처 1830명 포함)에 이른 북송 재일동포 가운데 만경봉호가 실어 나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3,500톤 규모인 만경봉호는 20여 년간 300회를 운항, 3만270여명의 고향방문단과 1만5,000톤의 화물을 수송하고, 1992년 만경봉 92호에 바톤을 넘겼다.
■ 9,672톤 규모에 350명 정원인 만경봉 92호는 김일성의 80번째 생일을 기념해 조총련 모금 40억 엔으로 건조됐다고 한다.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때는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을 태우고 부산 다대포항에 입항, 대회 기간 내내 응원단 숙소로 쓰여 구경거리가 되기도 했다. 부정기적으로 일본을 드나들던 만경봉 92호는 2006년 북한의 미사일 발사 및 핵실험 이후 일본정부의 입항 금지로 발이 묶이면서 한동안 뉴스에서 사라지는가 했다. 그런 만경봉 92호가 크루즈 유람선으로 변신해 다시 뉴스를 타기 시작했다.
■ 북한은 지난 주 라진항과 금강산을 연결하는 크루즈 관광을 선보였다. 동해안의 절경과 해돋이, 금강산의 빼어난 경치를 결합했으니 꽤 인기를 끌 만도 하다. 그러나 시범 크루즈 관광에 참여했던 외신기자들은 차가운 반응 일색이다. 유람선 내부 곳곳이 녹슬고 물이 나오지 않는 세면대도 많았다는 등 흉 잡힌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북한은 내년부터는 만경봉호 크루즈 관광 등을 통해 금강산에 10만명의 관광객을 불러들이겠다지만 실현하기 어려운 호언이다. 모든 게 엉성하고 불편한 크루즈 관광에 돈과 시간을 들여 참가할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