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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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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의 詩로 여는 아침]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입력
2011.09.06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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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은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머지않아 겨울이 올 것이다 그때는 지구 북쪽 끝의 얼음이 녹아 가까운 바닷가 마을까지 얼음조각을 흘려보내는 날이 오리라 한다 그때도 숲은 내 저문 육신과 그림자를 내치지 않을 것을 믿는다 지난봄과 여름 내가 굴참나무와 다람쥐와 아이들과 제비꽃을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그것들을 지키기 위해 보낸 시간이 얼마나 험했는지 꽃과 나무들이 알고 있으므로 대지가 고요한 손을 들어 증거해줄 것이다

아직도 내게는 몇시간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

"당신들은 열다섯이면 모두 죽는다오." 소설가 디드로의 이 문장을 읽는 순간 공감이 갔더랬습니다. 마음 깊은 어디쯤에 불건전한 성향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착한 이는 행복해지고 나쁜 이는 반드시 벌 받는다는 건 동화 속에나 있는 이야기. 세상에 별로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열다섯 살 뒤에는 적어도 절반쯤은 죽은 채로 살아가는 거니까요.

그래서 놀랐습니다. 감탄스럽고 질투가 납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에는 치열"하였노라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세 시와 다섯 시 사이는 자꾸 피로해져만 가는 시간일 뿐인데 시인은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기쁘게 기대해보겠노라고 말합니다. 시를 읽으며 시인의 향긋한 낙관주의에 중독되고 싶습니다. 다름 아닌 지금 이 시간이 내 생의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라고 우기면서 살아보고 싶어요.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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