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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천재화가 손상기 '시들지 않는 꽃'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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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한 천재화가 손상기 '시들지 않는 꽃' 전

입력
2011.09.05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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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오후의 한 삐뚜름한 골목길. 회백색의 집 벽에 사선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아이들이 그 아래 앉았다. 1980년대 가난하고 누추한 한 동네 어귀. 거칠지만 따뜻한 붓질이 느껴지는 이 그림은 요절 화가 손상기(1949~1988)의 것으로, 그의 딸 손세린(34)씨가 가장 아끼는 아버지의 그림이다.

그는 2일 화가의 고향인 전남 여수시 진남문예회관에서 개막한 아버지의 21주기 회고전에 걸린 '따스한 빛'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손씨는 "어렸을 적 살았던 북아현동의 골목길인데 화실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이곳에서 기다렸던 추억이 생각난다"며 "숨을 가쁘게 몰아 쉬며 올라오다 계단 끝에 제가 서 있으면 활짝 웃으시며 저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했다. 한겨울에는 오리털 파카 안에 품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방떡을 내밀던 아버지였다. 그림처럼 비루했지만 따뜻했던 시절이었다.

세 살 때 구루병을 앓아 평생 곱사등을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화가 손상기는 짧고 불우한 삶 속에서도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선보이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신체적 불구와 가난이 항상 그 주위를 맴돌았다. 그는 생전에 "생채기 난 꿈을 실현시키려는 욕망에서 꼭 그리지 않으면 안 될 필연적인 나의 모습을, 상실이 빚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어떤 것에서 헤어나기 위해 고함지르는 나의 모습을 화면에 욕심껏 표현했다"고 했다.

그는 화폭에 그와 동시대 민중들의 어두운 아픔을 고스란히 담았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공작도시' 연작은 1980년대 주로 그린 작품들로, 하늘과 맞닿을 듯한 달동네의 높고 가파른 축대와 좁은 계단과 골목들, 낮은 지붕들, 그 사이로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를 그린 것이다. 여수상고와 원광대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1979년 상경한 작가가 서울 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에서 가난에 허덕이며 바라본 차가운 도시와 부조리한 세상의 한 단면인 것.

그의 그림에서는 빈민들의 스산하고 고독한 삶이 읽혀진다. 연작 중 하나인 '귀가 행렬'은 일을 마치고 높디 높은 달동네를 향해 길을 힘겹게 오르는 소시민의 생활을 회청색의 가슴 시큰한 느낌으로 그린 작품이다. 하늘로 높이 솟구친 담벼락이 그림 속 인물을 압도한다. 손세린씨는 "아버지는 남들보다 시야가 낮을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 보니 자신의 눈높이에서 바라다본 세상은 아마 저렇게 높다란 벽과 같았을 겁니다. 그렇게 늘 낮은 데서, 낮은 자세로 세상을 보셨던 분이셨죠"라고 했다.

고개를 푹 수그린 꽃이나 앙상하게 마른 꽃, 가지 잘린 꽃을 그린 '시들지 않은 꽃'은 영원한 존재이고 싶었던 작가의 소망이 담긴 작품. 이미 시들어버려 더 이상 시들 수 없는 꽃을 의미한다. 이번 전시 제목이기도 하다.

1982년부터 작가와 인연을 맺은 샘터화랑 엄중구 대표는 "1981년에 작가가 어렵게 연 동덕미술관 전시를 본 고 전혁림 화백이 '시커먼 그림이 빛을 발하고 있는데, 그 그림이 곯고 있는 것 같다'며 추천했다"며 "어둡고 스산한 기운이 서려 있지만 그림 한구석에는 따뜻한 빛이 비춰져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는 그가 남긴 1,500여점 가운데 고향에서 따뜻한 가족 등을 소재로 그린 '양지', '실향'과 서울에서 홍등가 작부를 모델로 그린 '취녀' 연작 등 회화 40여점, 드로잉과 판화 60여점으로 추렸다. 전시는 16일까지. (061)683-0678

여수=강지원기자 styl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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