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우울한 방송. 가능하다. 서울 다음날. 12월 다음날. 가능하다. 떨어지다가 정지한 사람을 본다. 가능하다. 그는 자살하러 갔고 아직 안 왔다. 가능하다. 몇 번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는 이름이 있다. 예를 들면 사람. 가능하다. 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나는 거짓말쟁이였다. 가능하다. 내 고통에 침을 발라가며.
불안한 미래를 보내고 있었다. 가능하다. 강도가 검은 스타킹을 신고 들어왔다. 가능하다. 간혹 인간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찾아온다. 가능하다. 저녁에는 먹을 것을 달라고 와 있다가 한 순간 표범이 되기도 한다. 가능하다. 우리보다 더 검어서 살려주었다. 내가 모르는 사람. 혹은 도둑고양이.
가능하다. 물끄러미 서 있는 너희 두 사람이 내 아버지다. 가능하다. 죽은 사람과 말하는 돌에 대해서 쓸 생각이었다. 가능하다. 내 말은 뼈를 부러뜨리고 나온다. 가능하다. 오전 11시에서 1시 사이. 떨어지다가 정지한 사람을 본다. 가능하다. 누가 내 이름을 바꿔 부를 때도 되었다.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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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우리가 사는 세계가 가능한 세계들 중 가장 좋은 세계라는 놀라운 주장을 했습니다. 50년쯤 뒤에 이 말을 들은 한 사람이 화를 냈어요. 볼테르입니다. 1755년 리스본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건물의 85%가 무너진 데다 왕립도서관의 귀한 장서 7만권과 루벤스, 티치아노의 그림이 사라졌습니다. 지진으로 큰 충격을 받은 다른 계몽주의 지식인들처럼 볼테르는 라이프니츠의 낙관주의를 맹렬히 비판했어요.
시인은 철학적 논쟁에는 관심이 없어요. 어떤 불행한 가능세계를 엿볼 뿐입니다. 종일 우울한 방송만 흘러나오고 1월 1일은 새로울 것 없이 그저 12월의 다음날인 세계. 몇 번을 애써봐도 옆 사람을 이해하기가 어렵고 마주치는 것은 추락하는 이의 눈빛뿐인 세계. 더 배고프고 더 검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사람이 강도가 되는 세계. 시인은 지켜보다 담담하게 말합니다. ‘우리보다 더 검어서 살려주었다.’ 이런 독백이 가능한 세계는 불행하지만 아름다워요. 그렇지만 그 불행한 세계의 이름을 바꿔 부를 때도 되었습니다. 가능합니다.
김 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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