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엔 엄청난 충격이었다.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강대국 미국의 상징인 자유의 여신상이 쓰러져 있는 마지막 장면은 오래도록 뇌리에 남았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통탄하며 해변에 무릎 꿇고 울부짖던 주인공 테일러(찰톤 헤스톤)의 모습도 쉬 잊히지 않았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유인원의 지배를 받는다는 ‘혹성탈출’(1968)의 설정은 또렷한 메시지를 전했다. 인간이 서로에 대한 폭력으로 결국엔 몰락하고 유인원의 노예가 된다는 내용은 통렬하면서도 몸서리쳐지는 문명 비판이었다.
‘혹성탈출’에 담긴 여러 상징들은 머리가 좀 더 굵어진 다음에야 알아챌 수 있었다. 인간과 유인원의 관계는 1960년대 미국 사회의 키워드였던 인종 갈등의 비유이고, 동서냉전에 대한 에두른 표현이다. 유색인종과 공산주의에 대한 미국 백인들의 공포가 반영된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이어진 속편들에서 특히 인종 갈등에 대한 비유는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된다. 1편에 등장하는 유인원 부부가 1970년대 과거로 돌아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유인원의 노예 해방을 주도한다는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유인원 지도자가 폭력으로 상황을 뒤집으려는 인간들을 제압하고 화해와 공존을 모색한다는 시리즈의 결말은 당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상업성의 테두리 안에서도 시대의 화두를 다루려 했던 제작진의 의도가 느껴진다. ‘혹성탈출’이 지난 세기의 고전으로 남은 이유이리라.
21세기판 새로운 ‘혹성탈출’이 상영 중이다. ‘진화의 시작’이라는 별칭을 단 새 ‘혹성탈출’은 4일까지 219만명(영화진흥위원회 집계)을 모으며 흥행에서 짭짤한 재미를 보고 있다. 잔가지를 쳐낸 간결한 이야기 전개가 인간의 감정을 지닌 침팬지의 탁월한 ‘연기’(물론 컴퓨터그래픽에 힘입은 성과다)와 맞물리며 상업성을 더했다는 평가다. 106분의 단출한 상영 시간도 관객들의 호감을 샀다.
영화는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있지만 실망스럽기도 하다. 인간과 자연의 대립, 환경 파괴에 대한 자연의 역습이라는 은유는 그저 액세서리 같은 역할에 그칠 뿐이다. 원작보다 얇고 단조롭게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혹성탈출’이 등장한 지 43년. 그 사이 할리우드의 돈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진 것인지, 관객들의 취향이 더 단순해졌는지 알 수 없다. 이유야 어쨌든 새 ‘혹성탈출’의 흥행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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