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진 대한 육상경기연맹 회장(63)이 올해 신년 하례식에서 한 말이다. 오 회장은 대구 세계육상선수권을 통해 한국 육상의 진면목을 선보이자며 육상인들의 피와 땀을 요구했다. 대구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막을 내린 4일, 오 회장의 발언 중에서 남은 것이 있다면 위기뿐이다.
한국 육상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변명의 여지도 없다. 어디 한 군데 성한 곳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졌다. 첫날 첫 경기로 열린 여자마라톤부터 입에 올리기 부끄러운 수준차이로 밀려났다. 여자마라톤은 '10-10프로젝트'(10개 종목에서 10명의 결선 진출자를 내는 것)의 첫 번째 주자였다. 목표는 단체전 동메달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8개팀중 7위. 사실상 꼴찌나 마찬가지다. 대표팀 2명은 아마추어급 기량을 드러내며 3시간대로 골인했다. 한국육상의 어이없는 발걸음은 둘째날에도 이어졌다. 남자 100m 한국기록 보유자 김국영(20ㆍ안양시청)이 예선에서 부정출발로 실격 당한 것이다. 김국영은 특히 참가 선수 중 기록이 가장 앞서 본선진출이 유력해, 그의 부정출발은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소득도 있었다. 하지만 메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김현섭(26ㆍ삼성전자)과 박칠성(29ㆍ국군체육부대)이 경보 20km와 50km에서 각각 6,7위에 오른 것이다. 10종 경기 김건우(31ㆍ문경시청)와 남자 1,600m계주팀이 한국 기록을 경신했지만 최종성적은 17위와 예선탈락이었다.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결선진출(멀리뛰기)에 성공한 김덕현(26ㆍ광주광역시청)은 정작 결선에선 3번의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버리며 실격 당했다. 자신의 주종목인 세단뛰기는 뛰어보지도 못했다. 10-10은 애초부터 설 자리가 없었다.
과거에는 동양인의 체형적 한계를 이유로'한국 육상의 세계정복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통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중국과 일본에서 금메달이 나왔기 때문이다. 리얀펑(32ㆍ중국)과 무로후시 고지(37ㆍ일본)가 각각 여자 원반던지기와 남자 해머던지기 정상에 올랐다. 이들 두 나라는 2009년 베를린 대회서도 금과 은을 따냈다. 일본은 앞서 두 번(91년, 2007년)이나 세계육상선수권을 개최해 남녀 마라톤에서 금과 동을 캐내 개최국의 자존심을 살렸다. 하지만 한국은 역대 3번째로 노메달에 그친 개최국이라는 수모를 떠안게 됐다.
한국 육상 왜 망가졌는가
육상인들은 "한국육상이 안고 있는 고질병은 배가 부르다는데 있다"고 주저 없이 말한다. 이들은 "이전에는 배가 고파서 성적이 안 나왔는데 지금은 배가 불러서 기록이 저조하다"며 혀를 차고 있다. 실제 실업팀은 물론 각 시군구청 선수들의 연봉이 1억원을 넘는 곳도 있다. 힘들이지 않고 선수생활을 즐길 수 있는 이유다. 오창석 KBS마라톤 해설위원은 "시군구청 소속팀은 사실상 전국체전용이다. 고임금을 주고 이들을 기용하는 이유가 전국체전에서 메달을 얻기 위함이다. 이는 곧 해당 지자체장의 업적과 직결된다. 따라서 순위가 우선이고 기록은 뒷전인 구조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대한체육회의 무사안일 행정도 꼬집었다. 한국기록을 세웠어도 특별한 혜택이 없는 점수제를 수년째 고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한육상경기연맹 김정식 경기팀장도 "전국체전에서 1위로 골인하면 대한체육회는 소속 지자체에 79점을 준다. 여기에 한국신기록을 세우면 200%의 가산점을 더해 158점, 세계신기록을 세우면 가산점 300%가 붙어 237점을 부여한다. 심지어 완주만 해도 점수를 준다. 대한체육회는 이 점수를 바탕으로 시도 순위를 정한다. 해당 지자체장으로선 치적을 위해 팀을 만들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신기록 경신땐 200%가 아니라 가산점 1,000%로 올려서라도 육상진흥 특단의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대한체육회는 "양궁, 사격 등 타 종목과의 형평성을 고려해서 점수제를 확정했다"며 "육상에 대한 배려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대구=최형철기자 hc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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