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역사학자가 2011년 한국 사회를 파악할 작품을 찾을 때, 이 소설을 빼놓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중견 소설가 최인석씨의 새 장편 <연애, 하는 날> (문예중앙 발행)이다. 거시 경제적 지표 밑에 감추어진 우리 사회 여러 겹의 속살을 할퀴듯이 드러내는 이 소설은 현존의 사회적 갈등과 모순, 개인의 욕망과 상처가 응집돼 부글거린다. 연애,>
소설에 장전된 탄환은 부동산 문제, 연애 스폰서 문화, 비정규직 문제, 가족의 해체 등 우리 사회 심장부를 겨냥하는 현안들. 각 계층의 욕망을 대변하는 주인공들은 각각의 시점에서 방아쇠를 당겨 서로 충돌하고 부서진다. 복수(複數)의 목소리들의 불협화음으로 총체적 세계를 더듬는 것이 장편 소설의 정통이라면 오랜만에 장편다운 장편이 나온 셈이다. '이런 소설을 만나는 것이 실로 얼마 만인지.'(이창동 감독의 추천사 중)
소설의 주인공들을 살피면 이렇다. 부동산업자 장우는 삶의 가치를 돈과 쾌락의 플러스 마이너스로 환원시키는 인물. '모든 돈은 똥구덩이에서 나온다. 정직한 돈은 헛소리다'며 자신의 추악을 세계의 추악으로써 합리화하는 냉정한 확신범이다. 장우의 고교 동창이자 처남이며 그가 소유한 빌딩의 관리자인 두영은 폐쇄회로(CC)TV로 세입자를 훔쳐보고, 불륜을 저지른 장우를 협박해 돈을 뜯어내려는 등 야비한 속물의 전형. 장우와 두영은 티격태격하고 급기야 서로를 파국으로 몰고 가지만, 실은 두영은 장우의 어두운 구정물을 처리하는 장우의 쌍생아다.
이 반대 편에 선 인물은 텔레비전 수리공 상곤과 그의 아내 수진. 결혼 10년 만에야 동사무소에서 결혼식을 올린 부부지만, 그럼에도 그 가난 속에는 눈부신 웃음이 있었다. 어린 시절 수진과 한 동네에서 자란 장우는 우연히 결혼식장에서 수진을 보고 그 웃음을 훔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가난한 주제에 십여년이나 늦은 결혼식에서 어떻게 그토록 맑은 낯으로 웃어댈 수 있는가'라는 장우의 독백은 노동계급의 건강성에 대한 자본의 질투심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소설을 이끄는 핵심 사건은 여기서 출발한 수진과 장우의 불륜이다. 이들은 오피스텔에 '이월의 방'이라고 이름 붙인 불륜의 공간을 마련한다. '이 사랑보다 더 명백한 것은 없었다. 이처럼 생생하고 뜨거운 것은 없었다'며 수진은 난생 처음 낭만적 사랑에 빠져든다. 수진이 아이와 집을 버리고 나왔다가 종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그리는 작가의 펜은 가차없다. 그 한편으로 남편 상곤이 직원들을 대규모로 비정규직화 하려는 회사에 맞선 노동조합의 파업에 참가하는 과정이 맞물려 진행된다. 아울러 신인 영화감독 대일과 백화점 여직원 연숙 간의 사랑도 펼쳐지지만, 연숙 역시도 '장우-두영'으로 표상되는 욕망의 그물에 걸리며 일그러진다.
"난들 희망을 싫어할까. 허나 어쩌면 그 역시 그림자나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라는 작가의 말처럼, 소설은 끝내 희망의 여지 없이 상곤과 수진 부부를 비참한 벼랑 끝으로 몰아붙인다. 이 처참한 드라마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성격이 변화하는 인물은 상곤이다. 애초 파업 참가에도 소극적이었던 소심한 성격의 상곤은 아내의 가출로 가정이 파괴된 상황에서 점점 극한적 투쟁으로 내달린다. 그가 아내를 파멸시킨 장우를 찾아가 쏟아내는 욕설은 이 소설의 비등점이다. '의식의 흐름' 기법을 벼랑 끝에 몰린 노동자에게 적용한 듯 보이는 이 장면에서, 상곤은 거의 자동기술의 욕설을 분출시킨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사회에 축적된 무의식의 울분이 아닐런지. 지극히 사실적이면서도 지극히 초현실주의적인 이 장면은 한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연애, 하는 날> 은 1980년 희곡으로 등단한 최씨의 열 번째 장편 소설. 사회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잃지 않으면서 마술적 리얼리즘 등 다양한 기법을 선보이기도 한 그는 이번에는 정통의 서사로 정면 돌파하고자 한다. 지금도 휴대폰에 발자크 소설을 저장해 읽고 있고, 희망버스에 올라 좌절과 감동을 함께 경험했다는 그는 저 지글거리는 에너지를 소설이란 그릇에 통렬하게 담아냈다. 연애,>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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