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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사람/ 2002년 약값 인하 추진중 경질 이태복 前 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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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사람/ 2002년 약값 인하 추진중 경질 이태복 前 복지

입력
2011.09.02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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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최근 진수희 복지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부의 건강보험 약값 일괄 인하 발표를 보고, "환영한다"고 전하기 위해서였다. '약값 인하'는 9년 전 그가 그토록 하고 싶었던 일이며, 회환이 서린 정책이다. 이 전 장관은 2002년 7월 11일 부임 6개월 만에 물러나면서 "제약회사의 압력으로 경질됐다"는 퇴임사를 발표해 파문이 일었다.

약값 극비 조사, 인하 발표 하루 전 경질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누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해 정확한 내막을 밝히지 않았던 그는 9년 만에 전쟁 같은 상황을 털어놓았다. 1년 여간 청와대 복지노동수석을 지내고 2002년 1월 복지부 장관으로 부임한 그는 신영수 당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심평원장)을 불러 극비리에 지시를 내렸다. 호주 전문가를 고용, 국제 약값을 비교ㆍ분석해 보고하라는 내용이었다. 한국은 당시 제약회사들의 '노다지'였다. 건강보험 재정은 적자를 기록하는데도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신약뿐 아니라, 국내 복제약도 터무니 없이 비싸게 사주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전 장관은 장관 부임 직전 김 대통령에게 약값 인하 추진 계획을 전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새해 업무보고 일정을 잡는데 청와대 수석실에서 "약값 인하를 빼라"고 해 5월까지 업무보고가 미뤄졌다. 결국 문서에서는 약값 인하를 뺀 뒤 업무보고 자리에서 "구두로 보고할 것이 있다"며 약값 인하 계획을 설명했다. 대통령은 별 말이 없었다고 한다. 이 전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은 정확히 내막을 모르셨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후 받아본 호주 전문가의 보고서는 충격적이었다. 다국적 기업은 한국에서 선진 7개국과 똑같은 값으로 신약을 팔 수 있도록 약값이 책정돼 있었다. 국민소득이 선진국의 3분의 1에 불과한 상황이었으니, 한국의 약값은 선진국보다 3배가 더 비쌌던 셈. 더구나 외국은 신약이 나온 뒤 2~3년 후 유사신약이 나오면 신약 값이 떨어지도록 해놓았는데, 한국은 그런 조치도 전혀 없었다.

그는 7월 12일, 3년에 걸쳐 1조5,000억원의 약값을 인하한다는 계획을 깜짝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전날인 11일 경질 발표가 났다. 그렇게 약값 인하방안은 사장됐다.

외국 제약사 간부 "이거 하시면, 장관 못하십니다"

이 전 장관은 약값 인하 추진 과정에서 "이러면 장관 못하실 것"이라는 소리를 수없이 들었다고 했다. 심평원장이 걱정스러워 그런 말을 했고, 한번은 다국적 제약사 간부가 전화해서 같은 말을 했다. 걱정하는 말이 아니라, 사실상 협박과 다름없었다.

토머스 허버드 당시 주한 미 대사가 장관 취임 축하 인사를 와서 "(약값정책 등) 현안 실무협의를 하자"고 제안했고, 존 헌츠먼 미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는 미국 제약사가 한국에서 유럽제약사에 밀리지 않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전 장관은 "이미 다른 국가에서는 약값이 다 인하됐다"며 "협의할 것도 없고, 제약사 경쟁도 시장에서 할 일"이라고 거부했다. 거부 이후 압박은 청와대 등으로 향했다고 그는 설명했다.

주한미국 대사관은 7월 4일 독립기념일 파티에 그를 초청하기도 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그는 "무슨 일이냐"고 하자, 미 대사관에서 사람을 보내 "대사가 복지부 장관과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사진을 찍어 워싱턴에 보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전 장관이 알아보니 미 제약업계는 당시 공화당 정권에서 두 번째로 큰 후원단체였다. 그는 결국 파티에 가서 사진을 찍고 나오면서 "장관 계속 하기 어렵겠구나" 생각했다고 한다.

한심했던 공무원 사회

이 전 장관은 공무원을 믿지 못하고 독불장군처럼 굴었다는 악명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장관으로서 실패한 이유로 꼽는 사람도 있다. 이에 대해 그는 "당시 공무원들이 청와대와 장관에게 거짓 보고를 했다"며 상황을 설명했다. 선진 7개국과 똑같이 약값을 정한 사람이 누구냐고 부하 공무원에게 자료를 요구하자 "자료가 없다"고 답했다고 한다. 알아보니 이전 모 장관이 부임한 지 1주일 만에 결재한 것이었다. 그는 "아마 장관이 아무것도 모를 때 차관과 공무원들이 사인을 유도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실제 자신에게도 특정 약값의 결정 기한을 하루 남기고 결재를 올려 사인을 요구한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그는 "보통 시간이 없으면'이거 문제없지?'하고 그냥 결재를 하는데, 제약사와 결탁한 공무원들이 그것을 이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장관 재임시 간부 3명을 직위해제 했다. 그 중 한 명은 나중에 제약협회 부회장이 됐다.

또 청와대 복지수석으로 일할 때 "모두 해결했다"고 보고받았던 사안들이 장관으로 와서 보니 전혀 해결이 안된 것도 있었다고 한다. "청와대에 거짓보고를 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래도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공무원들이 있었다"며 "이제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은 시민단체 활? 국민들 어려움 안타까워

약값 인하에 실패했던 그는 진념 당시 부총리를 날마다 찾아가 바이오산업 육성에 8조원을 투입하도록 설득했던 것을 짧은 장관시절의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지금은 '5대거품빼기 범국민운동본부' 대표로 여전히 왕성할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예전에 거액의 사업비를 쏟아 부은 사업이 어떻게 돼가는지 찾아가보곤 하는데 제대로 되는 것이 없더라"고 한탄했다.

정부에 대한 질타도 이어졌다. 그는 "잘나가는 것은 수출 대기업 밖에 없으니, 국민들이 너무 어려운 것 같다"며 "미국도 군수품 조달의 37%는 무조건 중소기업에게 할당하는 등 육성하는데, 한국은 전자정부사업 등 정부조달 사업까지 대부분 대기업에 몰아준다, 우리 정부는 누구를 위해 일하는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진희기자 rive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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