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 사르트르가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고 끝내기엔 너무 이르다고 말한 시간. 가정주부 K에게 그 시간은 설거지와 빨래 개기를 잠시 미뤄두고 홍차를 우려 마시는 시간이다. 영국 도자기 브랜드 웨지우드의 퀸 오브 하츠(Queen of Hearts) 다기를 꺼내 잉글리시 애프터눈을 우려내고 있노라면 K는 이따끔 자신이 가정이라는 작은 왕국을 다스리는 젊고 아름다운 여왕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연애 시절의 알싸한 추억마저 떠오르는 것이, 마르셀 프루스트의 가 왜 홍차에 적신 마들렌 이야기로 시작하는지를 알 것도 같다.
9월의 초입, 여름과 가을 사이. 홍차를 처음 시작하기 가장 좋은 계절이다. 스트레이트 티로 다양한 홍차의 세계를 접한 후 겨울이 되면 밀크티를 마신다. 해가 바뀌어 봄 여름 볕이 강해지면 아이스티로 홍차의 삼위일체를 완성한다. 홍차 에세이 를 쓴 홍차 전문가 박정동 티아트 대표의 말처럼, 홍차는 "여자들을 거룩하게 만들어주는 음료"인지도 모른다.
커피와 와인 다음, 이제는 홍차의 차례
홍차 마니아들이 세를 불려가고 있다. 홍차 불모지 대한민국의 트렌드 요지마다 홍차 전문점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신촌의 클로리스, 이화여대 앞의 티앙팡, 홍대 앞의 카페 아트레, 신사동 가로수길의 더애프터눈, 삼성동의 페코티룸 등 열거하기도 어렵다.
온라인 카페도 북적거린다. 네이버의 홍차 마니아 카페 '오렌지페코'는 회원이 4만 7,000여명에 달한다. 홍차광들이 그릇 마니아와 한통속인 경우가 많아 살림하는 파워블로거 중 홍차 관련 포스팅 코너를 운영하는 이들도 많다.
국내 홍차문화를 주도하는 거점들은 주로 여행과 유학을 통해 외국에서 홍차 문화를 접한 이들이다. 단적인 예가 서울의 특급호텔들마다 빼놓을 수 없는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은 애프터눈티(Afternoon tea). 영국과 그 식민지였던 홍콩과 싱가포르 등지를 여행하면서 '오후의 홍차문화'를 접한 이들이 많아지면서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 사이 3만원 안팎으로 홍차와 함께 스콘, 핑거 샌드위치, 페이스트리, 마카롱 등의 베이커리를 먹을 수 있는 애프터눈티 세트가 유럽 상류문화의 상징처럼 한국여성들의 여심을 흔들고 있다.
상대적으로 녹차문화가 발달한 한국은 유라시아 대륙 국가 중 홍차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거의 유일한 나라로 꼽힌다. 홍차는 전 세계적으로 물 다음으로 많이 마시는 차로, 차의 75%가 홍차로, 나머지 25%가 녹차와 우롱차 등으로 소비된다. 그래서 많은 홍차 전문가들이, 커피와 와인이 한바탕 휩쓸고 갔듯, 이젠 홍차의 차례가 올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삶의 위로가 되는 여왕의 차
차나무의 찻잎을 발효하지 않고 덖거나 뜨거운 김에 쏘여 살짝 찌면 녹차가 되고, 공기 중에 그냥 두어 온도와 습도에 의해 발효시키면 홍차가 된다. 마치 깎아 놓은 사과가 공기 중에서 산화하면서 갈변현상을 일으키듯이 찻잎도 발효되면서 독특한 향기와 맛이 생겨난다. 발효 과정에서 찻잎이 까맣게 변한다 하여 영어로는 블랙티(black tea)라 불린다.
처음 홍차에 입문하면 와인만큼이나 복잡다기한 이름들 앞에 겁을 먹기 쉽지만, 작명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아무것도 섞지 않고 한 종으로만 우려 마시는 스트레이트 티(straight tea)에는 보통 산지명을 따서 붙인다. 세계 3대 홍차로 불리는 우바, 다질링, 기문이 각각 스리랑카와 인도, 중국의 산지명을 따다 붙인 이름이다. 이밖에 중국의 랍상소우총, 인도의 아쌈 등도 명품 홍차로 분류된다.
두 번째로는 향을 첨가한 플레이버드 티(flavored tea)가 있다. 이 가향홍차에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진 얼 그레이를 비롯해 퀸 앤, 듀크 오브 웰링턴, 프린스 오브 캔디 등 사람 이름을 따 붙인 스토리가 있는 홍차들이 많다. 얼 그레이는 19세기 초 영국의 수상이었던 찰스 그레이 백작이 선물 받고 즐겨 유명해진 홍차이며, 퀸 앤은 영국에 홍차 문화를 널리 퍼뜨린 앤 여왕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홍차에 차 한 잔으로 시름을 달래는 우아한 여왕의 이미지가 배어 있는 것은 바로 이 앤 여왕 때문이다.
홍차의 마지막 범주는 차와 차를 섞어 블렌딩한 홍차들(블렌디드 티ㆍblended tea).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잉글리시 애프터눈, 아이리시 브랙퍼스트, 로열 블렌드 등이 여기 속한다.
인도 스리랑카 중국 등 아시아에서 주로 재배되는 홍차가 유럽에 퍼져 고유의 문화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스페인의 캐서린 공주가 영국 왕실로 시집갈 때 중국 홍차와 설탕을 챙겨가 마시면서부터다. 이후 앤 여왕이 즉위하면서 왕실은 물론 영국 귀족들에게까지 홍차 문화가 퍼지기 시작했고, 19세기 식민지 제국주의를 통해 홍차 값이 싸지면서 영국 전역에 퍼지게 됐다.
홍차의 매력은 베리에이션
와인과 마찬가지로 홍차도 재배된 곳의 테루아(자연적인 환경과 토질)에 따라 맛이 다르다. 다질링은 특유의 상큼하고 달콤한 향이 입 안에 가득 퍼지는 맑고 가벼운 차인 반면 우바는 열대 과일처럼 좀 더 풍미가 강한, 소위 바디감이 있는 홍차다. 기문은 처음에는 훈연향이 나가다 뒷맛으로 난향이 나는 깊고 맑은 맛이 특징이다.
홍차의 매력은 우유와 얼음, 시럽 등을 이용해 다양하게 변주 가능하다는 데 있다. 마시는 방법은 크게 찻잎을 티포트에 우려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핫티, 우유와 홍차를 1대1로 배합한 밀크티, 얼음을 가득 채운 잔에 우린 홍차를 섞는 아이스티 세 가지로 나눈다.
다음은 박정동 티아트 대표가 초심자들에게 추천하는 각각의 메뉴에 어울리는 차종. 핫티로는 부드럽고 달콤한 잉글리시 애프터눈이 좋다. 먼저 물을 팔팔 끓여 티포트를 예열한 후 400㏄의 물에 2g의 홍차를 넣고 3분간 우리면 된다. 3분 후 스트레이너(거름망)로 걸러내 마신다. 번거롭겠지만 예열은 반드시 해야 차 본연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영국에서 주로 마시는 밀크티는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로 접하는 게 좋다. 강한 맛이 나 밀크티로 만들었을 때 홍차 본연의 맛이 잘 살아난다. 일본 만화 의 영향으로 아쌈을 쓰는 게 널리 유행하고 있으나 아쌈은 밀크티를 맛없게 만드는 차라는 게 박 대표의 생각. 홍차와 우유를 반반 배율로 섞은 후 기호에 따라 설탕이나 시럽을 넣는다.
아이스티는 얼 그레이로 해야 맛있다. 얼 그레이는 시트러스 계열의 지중해 과일 베르가모트에서 향을 뽑아 가향한 차로, 우려낸 차에 얼음을 넣고 설탕이나 시럽을 조금 첨가하면 된다. 기름기 많은 식사 후 개운하게 입을 헹구는 데 좋다.
박 대표는 "홍차는 막 다뤄도 쉽게 상처받거나 삐치지 않는 구김살 없는 차"라며 "다양한 방식으로 섞고 배합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취향을 찾아가는 여정이 황홀할 만큼 즐겁고 재미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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