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그대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다. 공휴일을 뺀 수요일 정오면 어김 없이 열리는, 서울 수송동 일본대사관 앞의 '수요집회'가 어제 985회를 기록했다. 1992년 1월8일 시작돼 2002년 3월13일 500회 모임으로 기네스북에 '세계에서 가장 오래 이어진 집회'로 기록된 이래 잇따라 기록을 경신해 왔다. 12월14일이면 1,000회에 이른다. 하늘이 감복하고도 남을 지극한 정성인데도 땅 위의 현실은 다르다. 가까운 장래의 변화 조짐도 기대난이다. 매주 일본대사관 창을 흔들다가 허공에 흩어지는 외침이 때로는 허망하다.
'국가 책임' 둘러싼 오랜 공방
수요집회의 외침은 하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일본 정부가 해결하라"는 것이다. 간단한 말인데도 이렇게 어렵다. '일본 정부'라는 말만 빼면 사실 인정, 사죄와 반성, 손해배상으로 이뤄지는 문제 해결 절차에 특별히 어려울 게 없다. 그러나 '일본 정부'라는 한 마디가 문제 해결의 난도를 까마득한 높이로 끌어올린다.
1993년 8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일본 관방장관 담화는 "위안소 설치를 요청하는 등 일본군이 직ㆍ간접으로 관여했고, 일본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맡았던 위안부 모집 과정에서 감언과 강압이 있었고, 관헌 등이 직접 모집과정에 가담한 일도 있었다"고 인정했다. 일본군의 관여와 일부 강제 연행 사실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언뜻 국가 범죄와 배상을 떠올릴 수 있었지만 지나친 기대였다. 일본군의 조직적 관여는 기껏해야 위안소 설치와 운영ㆍ관리에 한정됐을 뿐 강제 동원과의 연결은 한사코 피했다.
일본군의 조직적 강제 연행을 입증할 자료가 없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설사 엇비슷한 증거자료가 나오더라도 애초에 적극적으로 해석할 태세가 아니었다. 군의 조직적 관여를 인정하면 국가 범죄를 시인하는 것이고, 곧바로 행위 당시의 국가원수였던 히로히토(裕仁) 천황의 범죄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은 95년 8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이 실제로는 국가 예산에 적잖이 의존하면서도 민간기금 형태를 고집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기금은 '위로금'이란 이름으로 사실상의 배상을 겨냥했지만, 처음부터 '국가 책임'을 주장한 한국측 피해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게 못됐다. 설사 그런 주장이 아니었더라도 국내 분위기가 수용 욕구를 제약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일찌감치 "일본에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고, 김대중 전 대통령도 국내 지원을 택했다. 결국 이 기금은 한국 피해자들의 외면 속에 2002년 사업을 중단하고 2007년 문을 닫았다.
이런 경과로 보아 그제 헌법재판소 결정이 권고한 정부의 대일 외교노력 강화도 실효성이 의심스럽다. 헌재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배상청구권이 65년 한일 청구권협정 제2조 1항의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음을 확인한' 청구권 문제에 포함되는지 여부에 대한 양국의 해석 분쟁을 협정 3조의 '우선 외교 경로로 해결하고, 안 되면 중재위에 회부한다'는 규정에 따르지 않은 정부의 부작위가 위헌이라고 지적했다.
헌재 결정도 실효성 기대 어려워
이 결정에 따라 정부는 대일 외교에서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그것으로도 해결되지 않으면 중재 절차를 밟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 핵심 문제는 늘 한국 정부의 노력 여하가 아니라 일본 정부의 자세였다는 점에서 실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정부와 민간 차원의 대일 설득은 그 동안에도 꾸준히 이어져 왔고, 중재 결정의 구속성을 고려하면 쉽사리 뛰어들 절차도 아니다. 이런 '불편한 진실'이 헌재 결정을 환영하다가도, 그래서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자문하게 한다.
20년 가까운 세월에도 변함없이 '국가 책임'을 외치는 수요집회의 일관성이 놀랍다. 아울러 피해자들의 길지 않을 여생을 생각하면, 수요일마다 높고 단단한 벽을 때리는 강고한 의지가 회를 거듭할수록 안타깝다.
황영식 논설위원 yshw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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