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풍당당(女風堂堂)'이란 말을 자주 듣는다. 사법시험이나 외무고시 같은 시험에서 여성 돌풍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기업 입사전형에서도 서류심사와 필기시험 통과만 보면 여성이 더 많고, 내신 상위권을 휩쓰는 여학생들 기세에 눌려 남녀공학을 기피하는 남학생이 늘고 있다고 한다.
급기야 세대를 막론하고 한껏 쪼그라든 남성들의 지위를 한탄하는 목소리에, '남성 역차별'에 대한 우려까지 섞여 들려온다. 이런 말 들을 때마다 솔직히 헛웃음이 난다. 아직도 별 대단찮은 자리에 여성이 처음 올라도 '첫 여성 ○○○ 탄생'이란 제목을 달고 신문에 기사가 나는 게 대한민국 현실이다. 이런데 역차별이라니, 엄살이 지나치다.
여성의 승진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이 어느 곳보다 견고했던 대기업에도 여풍이 불 모양이다. 얼마 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앞으로는 여성이 최고경영자(CEO)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 것을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당장 삼성에 오너집안 출신이 아닌 여성 CEO가 탄생한 것도, 여성 CEO 임명 계획을 분명히 밝힌 것도 아닌데, 이리 호들갑 떨 일인가 싶어 좀 의아했다. 기자들의 친절한 해설처럼, "올 연말 삼성그룹 정기인사에서 여성 인력의 승진이 대폭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 그대로 현실이 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사회적 약자(여성도 아직은 약자다!)가 흔히 가질 수 있는 자격지심 탓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회장의 이 느닷없는 발언이 좀 못마땅하다. 이 회장은 "여성 임원들이 (중략) 어려움을 유연하게 잘 이겨냈다는 것이 느껴지고, 역시 유연해야 살아남는다는 것을 느꼈다. 능력있고 유연하니 경쟁에서 질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말한 '유연하게'가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여성이 사회생활에서 닥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가져야 할 자세를 '유연함'이라는 한 단어에 가두어버린 것이 옳은지 의문이다. 그가 여성 임원들을 모아놓고 "경쟁에서 이길 수 있고, 이겨내야 한다"고 '교시(敎示)'하듯 말하기에 앞서, 삼성은 과연 여성들도 능력만 있으면 충분히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지 세심하게 점검해 보았는지도 여전히 물음표가 남는다.
단순한 격려인지, 확고한 의지의 표현인지도 모를 모호한 말 몇 마디를 놓고 "이건희 회장의 한마디가 재계의 화두가 되는 사례가 많았음을 감안하면 다른 그룹들도 여성의 고위직 진출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될 것 같다"는 식의 익명의 재계 관계자 말을 인용해 호들갑을 떤 언론의 태도 역시 마땅치 않다. 아무리 삼성이 우리사회 전반을 쥐락펴락하는 존재라도, 그 말 한 마디에 고질적 성차별 해소에 서광이 비칠 거라 낙관하는 순진함 혹은 무신경함에 낯이 뜨거울 지경이다.
말꼬리 잡는 김에 하나 더 지적하자. 삼성 같은 대기업에 여성 CEO가 한 두 명 탄생하면 그 견고한 '유리천장'이 깨질까. 아니, 두께가 얇아지기라도 할까. 실제로 여성 CEO가 탄생한다면 그 의미는 작지 않을 터. 그러나 그것이 '유연하게' 어려움을 극복한 능력 뛰어난 몇몇 여성들의 성취에 그친다면, 일하는 여성들의 삶은 별반 달라질 것이 없다. 수많은 일하는 여성들에게 당장 절박한 것은 바라보기도 벅찬 최고경영자 승진 가능성이 아니라, 눈치 보지 않고 결혼하고 애 낳아 키우며 일 할 수 있는 환경이다. 우리사회에 뿌리깊은 성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은 '슈퍼우먼' 몇 명이 아니라, 평범하지만 성실한 다수의 여성들이 제 대접을 받을 때 비로소 열리는 것 아닐까.
이희정 문화부장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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