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사로운 일상 속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희로애락이 담기면, 암기력과 관계없이 그 특정 시기가 자연스레 각인되곤 하는데, 가족사가 아닌 공적인 생활에서 나에게는 1994년이 뜻있는 한 해였다. 공동저자로서 세계적 권위의 학술지인 사이언스에 논문을 게재하고, 조교수로 임용되어 교수ㆍ연구자로서 홀로서기를 시작하는 기회와 더불어 나와 동일한 연구 분야에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 한 인물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근래 나의 94년에는 10년 전에 개봉된 영화로 인해 또 다른 감동 하나가 추가되었다.
2002년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 등을 수상한 러셀 크로우 주연의 '뷰티풀 마인드'는 94년 노벨경제학상을 공동 수상한 존 내쉬 교수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됐다. 극적인 요소가 가미된 영화 속 이야기는 실상과 차이가 있겠으나,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환자가 의료진과 일정 간격을 유지하며 치료와 사회생활을 병행하는 가운데 노벨상을 수상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놀라움을 넘어서서 경의를 표할 일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영화에 일가견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회장은 주연만이 아닌 조연과 여러 등장인물, 감독과 카메라맨 등의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가지고 영화를 감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영화 시나리오에 대한 단편적인 해석을 넘어서서 인간심리와 관계, 시대상황과 사회구조 등에 대해 통시(洞視)적인 이해와 분석을 가능케 하는 온전한 감상법이라고 생각한다. 공사(公私)를 막론하고 이 회장은 삶의 지혜를 이와 같은 입체적 사고의 틀에서 찾았을 법하다.
이 회장의 시각을 좇아 영화 '뷰티풀 마인드'를 3차례 감상하며, 존 내쉬 교수의 삶의 여정뿐 아니라 그 주위 인물들의 역할과 인간애에 진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나의 마음이 따라간 곳은 - 우리나라가 연연하고 있는 노벨상 수상의 결과보다는 - 장애가 있는 아픈 사람을 환자 이전에 인간으로, 사회 구성원으로 인정하며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자 애쓰는 사회ㆍ교육 공동체의 아름다운 모습과 내실을 찾아가는 체제였다.
선생으로서 나에게는 현재진행형의 아픔이 있다. 요즈음 의대 입학은 공부의 달인에게조차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사실인데, Z 학생은 별 중에 별이라 할 수 있는 성적장학생으로 의대에 입학하여 동량지재로서 기대를 받았다. 그러나 일정 기간이 지나면서 치료를 요하는 정신적 장애의 엄습으로 재학과 휴학을 반복하게 되었다. 다수의 재학생을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학칙과 규정을 엄격하게 적용했으며, 안타깝게도 복학을 적극적으로 권유할 수가 없었다.
지난 3월에는 솔직 담백한 모습과 촌철살인의 입담으로 국민할매 자리를 꿰차고 있는 록밴드 부활의 리더 김태원이 자폐증이 있는 자신의 아들에 대해, 장애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 때문에 외국 이민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 시린 사연을 고백했다.
부끄러운 우리 자화상의 상처와 아픔을 씻어내고, 국민할매 가족이 대한민국 하늘 아래서 함께 살아가는 일상의 기쁨을 누릴 수는 없을까. Z 학생이 자신의 날개를 조심조심 펼쳐가며 우리와 더불어 살아가는 날이 바로 오늘이면 좋겠다. 미국 원주민 오마하족의 격언,'한 아이를 키우는 데는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가 머리와 가슴 속에 산울림의 여운으로 남는다.
백광진 중앙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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