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덕(1891~1956)은 상해 임시정부의 문화부장(문화부 장관)을 지낸 독립운동가이다. 경북 고령에서 태어나 경신중학교를 거쳐 와세다대 경영학부 학생이던 1919년 2ㆍ8독립선언을 주도한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는 중국으로 넘어가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1945년 임정 요인들과 함께 귀국하던 그의 서열은 '김구 주석, 김규식 부주석, 이시영 국무위원, 김상덕 문화부장' 순(장준하 저 에서)이고 거의 모든 사진에도 김구 주석 가까이 있다. 해방 후 그는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아 친일 잔재의 제거에 힘을 썼다. 그런데도 그는 기여도에 비해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1950년 납북된 후 그에 대한 현창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해야 한다는 소리가 느닷없이 커지는 역사왜곡의 현장 속에서 이승만의 친일파 등용에 맞서서 꼿꼿이 국가자존심을 바로 세우려 했던 고인의 이야기를 아들 김정륙(76ㆍ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씨로부터 들어보았다.
_ 서울에 이승만 동상이 다시 세워지는 등 초대 대통령에 대한 현양운동이 한창입니다.
"자유총연맹에 동상이 세워지는 날, 나도 가서 반대시위를 했어요. 이 박사가 범죄자적 심판을 받았는데 몇 십년이 지나니까 지고지순한 민주주의를 지킨 대통령으로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있어서는 안될 일입니다."
_ 왜요?
"이 박사는 우리 사회에 친일파들이 자리잡게 해서 국가의 근간을 흔들었습니다. 반민특위라는 헌법기관을 대통령 마음대로 해체한 것이나, 사변(6ㆍ25전쟁) 중에 우리나라 땅덩이가 겨우 경상도 정도로 남은 절체절명의 시기에 부산에 피난 가 있으면서 내각제를 대통령 직선제로 바꾼다고 국회의원들을 잡아가두면서 개헌을 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헌정을 유린한 사람, 자기한테 안 맞는 것은 다 때려부순 사람, 내가 곧 법이던 사람이 어떻게 민주주의를 지킨 사람이 되겠습니까."
_ 반민특위가 해체되던 1949년에 중학교 2학년, 6ㆍ25전쟁이 터지던 해에 중학교 3학년이었으니 당시 일을 기억하시겠어요.
"아버지는 이 박사의 라디오 방송이 없었다면 납북되지도 않았을 겁니다. 피난을 가야 한다고 불안해하고 있는데 6월 27일에 이 박사가 라디오에 나와 '나 이승만이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동요하지 마라, 믿으라'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그게 녹음방송인지 육성방송(생중계)인지 전혀 몰랐어요. 나중에 보니 당시 이 박사는 이미 대전으로 피신한 상태에서 이걸 녹음해서는 방송을 틀게 했습니다. 당시 방송 내용에 대해서는 역사자료가 엇갈리고 있는데 우리집에서 들은 내용은 분명 이것이었고 그걸 믿고 피난을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28일 새벽에 한강다리가 폭파되고 중앙청에 인공기가 휘날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필동에 있는 반민특위 위원장 관사에 살았는데 아버지는 돈화문 옆에 있는 친척집으로 피신을 했어요. 나는 나가면 인민군으로 잡혀가니까 숨어있고 두 살 위인 누나가 연락을 맡았어요. 전쟁이 터지면서 하숙집에서 쫓겨난 학생들이 밥이라도 먹자고 우리집에 많이 드나들었어요. 청년이 득시글하니까 주목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열흘쯤 지나서 (북한) 내무서원들이 우리집에 들이닥치더니 생필품을 제외한 모든 것에 차압 딱지를 붙였어요. 그러면서 응접실의 가구를 확 미는데 권총이 한 자루 떨어지는 겁니다. 전쟁 전에 이 집에는 반민특위 조사관이던 심륜씨 부부와 그 처남, 처남의 고향 후배인 고려대 신입생 천금준씨가 함께 살았어요. 이 분이 나중에 자형이 되었습니다. 심륜씨는 반민특위가 해체되자 아버지에게 부탁을 해서 보병학교에 들어가더니 5월에 소위로 임관이 되자 헌병사령부 발령을 받았어요.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자기가 갖고 있는 권총을 오발해서 손에 총상을 입습니다. 그리고 6ㆍ25를 맞았거든요. 총상 입었고 헌병 장교이고 한강다리는 폭파되었고, 잡히면 바로 죽겠구나 싶어서 정신이 없어요. 집에 쫓아 들어오더니 부인을 데리고 남쪽으로 간다고, 우리가 걱정이 되어서 권총을 물어보니까 감쪽같이 숨겨놓았으니까 걱정말라고, 그게 의자 밑에서 나온 거예요. 결국 나와 천금준씨가 내무서에 잡혀가서 8일 동안 고초를 겪었어요. 대학생과 중학생이고 아버지는 반민특위 위원장을 한 걸 파악하더니 좋은 일 한다고 방면했어요. 집에 와서는 의식을 잃은 듯 쓰러졌어요. 누나가 걱정이 되니까 아버지한테 이야기를 했어요. 아버지가 독립운동하다가 마흔 넘어서 하나 얻은 아들이 죽게 생겨 먹으니까 밤새 고민하다가 관사에 나타난 거예요. 나는 너무 놀라서 앓는 중에도 벌떡 일어나서 아버지를 바깥으로 밀어냈어요. 아버지가 나가는데 검은 지프차 한 대에 무장한 사복군인 둘이 나타나요. 남반부에서 훌륭한 사업을 하신 걸 안다고, 잠깐 모시겠다고, 우리 보고 걱정 말라고 해요. 그게 마지막입니다."
_ 아버님 반응은.
"걱정 말라면서 태연히 따라가셨어요."
_ 그리고는 월북 좌익이라는 꼬리표를 달게 되었지요.
"1990년에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으셨는데도 이번 8월에 납북피해자로 정부에서 공식인정하기까지 뉴라이트들은 계속 월북 좌익으로 공격을 했지요. 납북 국회의원이 80여명인데 이번에 겨우 7명만 납북으로 인정받았으니 그것도 문제입니다."
_ 일제 때 항일운동하던 지식인들 가운데는 좌익이 많았는데 아버님은 좌익이 아니라고 확신하시는 건가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1926년에 유일책진운동이 일어납니다. 독립운동하는 조직을 하나로 뭉쳐서 힘을 결집시키자는 것인데 분열될 위기에 있으니까 안창호 김동삼 이탁 선생이 중재에 나섰어요. 상해에 있던 안창호 선생이 만주까지 왔습니다. 이게 깨지면 역사의 죄인이 된다… 그래서 전체 조직을 아우르는 역할을 맡기려고 만든 것이 시사연구회입니다. 아버지가 이 시사연구회 집행위원장이 되었는데 이때 공산당이 분란만 일으키니까 공산당만 배제를 했습니다. 물론 아버지가 모스크바 극동회의에 가서 레닌도 만나고 고려공산당에 참여한 적도 있어요.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협력한 것인데, 자료가 빈약하니까 공산주의자다 추론을 하는데… 그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에 전혀 협조를 안해서 1956년에 숙청되어 돌아가셨으니까요."
_ 이승만 대통령을 직접 만나본 적은 있습니까?
"반민특위가 해체되기 직전인 1949년 5월말에 관사로 이 박사가 직접 온 적이 있습니다. 이 박사는 경무대로 아버지를 여러 차례 부르셨답니다. 이런 사람 없으면 치안 보장 안된다 풀어줘라, 그게 일제경찰 노덕술이에요. 독립운동가들을 혹독하게 고문해서 승승장구한 사람인데 방면하면 처벌법이 의미가 없잖아요. 아버지는 초대 대통령인데 이런 사람을 어떻게 방면하라고 하십니까, 하면서 이 박사를 설득하려 했답니다. 5월말에 경무대서 은밀히 아버지를 만나자고 연락을 해왔어요. 밤에 갈 테니까 관사에서 만나자. 아버지가 우리를 다 부르더라구요. 각자 방에 들어가서 내가 나오라고 할 때까지 꼼짝말고 있어라. 집 오른편 방에 경호실이 있는데 그 경호실 경찰관까지 내 방에 들어가라고 했어요. 경무대 경호팀이 접수를 한 거지요. 나중에 아버지 수행비서가 전해주길 아버지를 회유하려 했다고 해요. 아버지가 굉장히 불쾌하게 거절을 했으니 이 박사가 화가 나서 돌아간 거예요. 그리고는 6월 6일에 반민특위 사무실로 경찰이 쳐들어왔어요. 직원들 무장해제하고 서류 탈취하고, 급보 받고 달려온 경찰청장까지 순경이 무장해제를 시켰다고 합니다."
_ 당시 이 대통령이 아버님한테 전한 회유책은 뭐였나요?
"장관직을 제안하면서 함께 하자고 했답니다. 이 박사가 돌아가고 방에서 나왔는데 그렇게 아버지 표정이 굳은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이후 아버지는 백색테러를 걱정해서 친척집을 옮겨다니다가 1950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고향인 고령으로 가셨고 거기서 떨어진 후 다시 관사로 돌아오셔서 가족이 합쳤는데, 전쟁이 터졌어요."
_ 백범 김구 선생은 직접 보신 적이 있다고요.
"네. 아버지는 임정 요인들과 함께 1945년 11월에 귀국해서 경교장에 사셨고 임정 가족에 대한 교통편이 늦게 마련되어서 나와 누나는 1946년 3월에야 귀국했습니다. 서울역 근처 여관에 며칠 살다가 아버지가 찾아오셔서 경교장으로 옮겼지요. 이 해 말까지 경교장에서 살았습니다. 중국에 살 때 하도 굶어서 밥 먹으러 오라는 소리가 제일 좋았습니다. 거기 살던 임정 요인들은 모두 지하에 있는 식당에서 밥을 함께 먹었는데 김구 주석만은 밥을 차려서 2층으로 따로 올려드렸습니다. 체구가 큰데 생각했던 것보다 식사량은 적어요. 그 집에 꼬마라고는 나 혼자니까 2층 베란다 쪽으로 들락거리면 백범 주석이 소리 듣고 불러요. 안 갈 수가 없잖아요. 사과나 아이스크림 같은 디저트, 상에 맛있는 것 있으면 주시려고 해요. 몇 번 가보니 너무 숨막혀서 살금살금 다녔어요. (같이 살던) 김규식 선생은 냉랭하고 조항구 선생은 다혈질이라 무서운데, 백범은 성품은 무섭지 않은데 위엄이 있어요. 어른도 어려워하는 걸 눈으로 봐놓으니까 어렵지요. 한번은 백범이 사라졌다고 경교장이 발칵 뒤집혔는데, 서울시교육청 쪽으로 통하는 담장 사이 뚫린 곳을 지나 서대문시장에 가서 빈대떡을 드시고 계셨더라는 그런 일도 있었어요."
_ 독립운동가 자제로 중국에서 살 때는 어머니도 일?잃고, 동생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고, 누나와 고아원에 맡겨지기도 하다가 아버님 납북 후에는 연좌제 때문에 막노동으로 연명하시기도 했다고요.
"그렇지만 1994년에는 아버지 덕분에 신부전증을 앓던 아내가 신장 기증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신장 기부를 요청해놓았더니 어느 날 연락이 와서 세브란스병원에서 신장이식수술을 받고 특실에서 가료를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기택 당시 민주당 총재의 부인 이경의 여사가 신장을 기증키로 하고 받을 사람 명단을 고르다가 '독립운동가 가족'이라는 기록을 보고 제 아내를 선택했다고 하더군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며느리를 살렸다 그랬지요. 연좌제는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분명 연좌제 때문에 취직할 엄두도 못 냈는데 1990년 아버지가 서훈 받은 것을 계기로 호적을 떼어보니 아무 흔적이 없어요. 분명 호적에 빨간 줄이 간다고 했는데, 빨간 줄은 없고 어머니 이름만 곧을 정(貞) 자를 순할 순(順) 자로 잘못 올려놓았더군요. 연좌제가 정말 유령 같은 법이구나, 법적인 근거는 하나도 없고 법조문도 없고 표시도 없는데 실제로 살면서는 압박을 그렇게 받는 그런 법이니까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다시 이 박사가 옳다고 하고, 올바른 이야기를 하면 좌익이라고 몰아붙이고 그러면 보이지도 않는 유령 같은 위협에 또 시달리는 세상이 오는 게 아닌가, 그게 참 걱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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