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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북한의 신 등거리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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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북한의 신 등거리 외교

입력
2011.08.26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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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은 한반도 분단 고착화 과정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 해 5ㆍ16 군사 쿠테타로 남한에 군사정부가 들어선 지 두 달이 채 안된 7월 북한은 소련, 중국과 잇따라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했다. 유사시 군사 자동개입을 규정한 동맹조약이다. 1953년 한ㆍ미 상호방위 조약에 이어 북ㆍ중, 북ㆍ소 간 동맹 조약 체결로 한반도 분단체제는 국제적 성격이 보다 뚜렷해졌다. 두 조약 체결을 위한 김일성의 러시아, 중국 방문은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김일성이 남한의 군사정부 출현에 위기감을 느껴 두 나라와의 조약 체결을 서둘렀다는 해석도 있다.

■ 김일성은 조약 체결을 위해 러시아 중국 방문 길에 오르면서 당시 19세였던 김정일도 데리고 갔다. 그때부터 후계를 염두에 두고 외교수업을 시킨 것이다. 김일성은 전용열차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달려 모스크바로 가는 도중 바이칼호를 둘러봤다. 따라서 이번 러시아 방문 길에 김 위원장이 바이칼호를 찾은 것은 두 번째이며 아버지 수행 기억을 되살린 회상 여행이기도 하다. 조선중앙통신은"1961년 7월 외국 방문길에 오르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를 모시였던 잊지 못할 역사의 사적이 깃들어 있다"고 각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 중국을 경유하는 김 위원장의 귀로도 당시와 비슷하다.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흐루시초프 수상과 조ㆍ소조약에 서명한 뒤 바로 전용열차로 중국 베이징을 방문, 저우언라이 수상과 조ㆍ중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국경분쟁과 수정주의 논란으로 첨예하게 갈등하던 두 나라와 동시에 관계를 강화하면서 등거리 외교를 펴려는 모양새 갖추기였을 것이다. 김 위원장이 이번에 러시아 방문 후 중국을 거쳐 돌아오는 것은 이를 벤치마킹 하는 셈이다. 러시아 방문과 북ㆍ러 정상회담을 통해 지금까지 중국에 쏠렸던 힘의 균형을 회복하고 동시에 중국의 오해도 사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 김일성의 등거리 외교는 당시 상황에선 현명한 선택이었다. 첨예하게 대결하던 중ㆍ소 양측의 경쟁을 유도하며 경제적ㆍ군사적 지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부터 본격화한 주체 노선이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북한이 고립의 길을 걷게 된 뿌리가 되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김 위원장은 이번 러시아와 중국 방문을 통해 두 나라의 정치외교적 지원을 확보하고 경제협력을 얻어내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뒀을지 모른다. 하지만 중ㆍ러 두 나라와의 관계만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점을 역사적 경험에서 깨달아야 한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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