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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교언(巧言)과 궤변(詭辯)의 풍경

입력
2011.08.26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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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십여 년이 훨씬 지난 일이다. 3층짜리 공동주택 2층에 살았는데, 아랫집으로부터 이틀이 멀다 하고 조용히 해달라는 불만을 들었다. 답답했다. 식구라야 돌 지난 사내애 하나에 부부뿐이니, 대체 무슨 소리가 불편을 줬는지조차 묘연했다.

수수께끼가 풀린 건 한 달여 간의 악몽을 더 겪은 후다. 3층 아이들이 가끔 거실에서 농구공을 튀겼는데, 그 소리가 1층까지 울렸던 것이다. 어느 날 분기탱천해 뛰어올라온 1층 주인남자를 안으로 들여 3층에서 들려오는 농구공 소리를 직접 확인시켰다.

"다같이 좀 참으면서 사는 거 아닙니까. 바로 아래층인 우리도 그러려니 하는 애들 소음 갖고 그렇게 예민하면 어디 이웃에서 편히 숨이나 쉬겠어요"라고 한마디 했다. 기막힌 일이 벌어진 건 그 뒤다. 얼굴이 벌개져 어쩔 줄 몰라 하는 남자 뒤에서 혼기를 넘긴 그 집 딸이 느닷없이 앙칼지게 나섰던 것이다. "아니, 아저씨네가 그런 식으로 참으니까 소음이 계속된 거 아녜요. 그러니 아저씨네도 할 말 없어요."

무상급식 투표 아집과 기만 난무

무고한 이웃을 괴롭힌 걸 사과하긴커녕 대체 무슨 적반하장인가, 했다가 왠지 병적으로 흔들리는 그 딸의 불안한 눈동자를 보곤 에라 관두자, 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일은 아집(我執)이 사람의 인식과 표현을 얼마나 뒤틀리게 만드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무상급식 지원범위를 묻는 서울시의 주민투표 과정에서도 강퍅한 정파적 아집과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야바위가 판을 쳤다. 아집이 생각 부족의 결과라면, 야바위는 알면서 자행하는 기만(欺瞞)이다. 어떤 경우든 아집과 야바위는 사실을 왜곡하고 올바른 사회적 의견수렴을 방해하는 교언과 궤변이 되어 난무했다. 인터넷과 거리의 플래카드뿐만 아니었다. 내로라하는 신문들까지 선거철의 당보에나 실릴 만한 속이 빤한 얘기를 기사라고 버젓이 앞 다퉈 갈겨댔다.

'부자 아이, 가난한 아이 편가르는 나쁜투표'라는 투표 불참운동 구호는 야당에선 투표 무산을 이끈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 구호는 소득 하위 50%인 저소득층 학생들에게 무상급식을 하겠다는 소득별 복지정책을 '빈부의 편을 가르는 정책'으로 교묘히 호도했다. 복지시책의 기본틀 중 하나인 소득기준 구분을 갖고 계층갈등을 조장한 나쁜 교언에 불과하다.

한 신문은 투표를 앞두고 느닷없이 오세훈 서울시장의 밥값 기사를 내보냈다. '무상급식 반대하는 시장님, 세금으로 13만7,720원짜리 식사'라는 자극적 제목의 이 기사는 오 시장이 한끼 2,500원이 안 되는 아이들 무상급식엔 반대하면서 자신은 호텔 식당 등에서 세금으로 최고급 식사를 즐겼다는 식이다. 하지만 오 시장이 무상급식 자체를 반대한 것도 아닌데다, 업무와 무관하게 미식을 즐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실을 크게 왜곡한 것이다. 기사 게재시점이나 내용 모두 정파적 의식에 매몰돼 정론 대신 궤변을 늘어놓은 낯부끄러운 야바위 기사였다.

신실하고 멋진 말로 공론 벌여야

선거법의 '허위사실공포죄'처럼 투표 구호나 캠페인을 신중하게 규제할 수 있는 수단이 주민투표법에 없기 때문에 이번 주민투표 캠페인이 제멋대로였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문제는 법이 아니라 사람이고 풍조(風潮)다. '정치적 수사(修辭)'란 현상을 멋대로 왜곡해서 정파적 이익을 도모하는 교언과 궤변이 아니라, 국민에게 현상을 가장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다듬어진 멋진 말이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여론의 근간인 언론 역시 끊임없이 교언과 궤변을 경계하며 스스로 품격과 권위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공론(公論)이 온통 교언과 궤변으로 오염될 정도로 우리 사회의 양식과 염치가 졸렬해졌다는 사실이 개탄스럽다.

10월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내년 총선, 대선을 앞두고 여와 야, 보수와 진보 간 복지논쟁이 그 어느 때 보다 가열될 조짐이다. 공론이 보다 신실하고 멋진 말로 채워질 수 있도록 다같이 크게 마음을 써야 할 때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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