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내전은 이제 지중해 연안도시 시르테에서 결판날 것으로 보인다. 외신들은 “트리폴리에서 패퇴한 정부군이 시르테로 속속 집결하고 있다”고 전했고, 행방이 묘연한 카다피가 고향인 시르테에 은신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카다피는 왜 인구 13만명에 불과한 소도시에 집착할까. 트리폴리에서 동쪽으로 360㎞ 떨어진 시르테는 20년 전 만해도 변변한 도로 하나 없는 사막의 시골마을이었다. 카다피가 1969년 정권을 잡은 뒤에도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카다피는 1980년대 말 시르테를 제2의 수도로 키우기로 결심한다. 미국의 허핑턴포스트는 “카다피는 황무지에 세워진 브라질의 계획도시 브라질리아를 염두에 두고 시르테를 자신의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할 최적지로 꼽았다”고 전했다. 곧 시르테는 넓은 포장 도로가 깔리고, 호텔과 회의장 등 대형 건물들이 속속 들어서는 등 신천지로 변모했다. 리비아 의회를 포함한 각종 정부기관의 이전도 진행됐다.
이후 시르테는 중동ㆍ아프리카 외교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1999년에는 아프리카연합(AU)을 태동시킨 시르테 선언이 채택됐고 수단 다르푸르 분쟁 협상(2007), 아랍연맹(AL) 정상회의(2010) 등 굵직한 국제회의를 수시로 개최했다. 택시 운전사, 점원, 문지기 등 수많은 일자리도 만들어졌다. 시르테 주민은 윤택한 삶을 선사한 카다피에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시르테는 주민의 절반 이상이 카다피가 속한 카다파 부족 출신이다. 다수의 리비아 관련 책을 펴낸 로널드 브루스 존스는 “오랫동안 내ㆍ외부의 위협에 시달려 온 카다피가 마지막에 믿을 건 피로 맺어진 가족과 부족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시르테를 최후의 보루로 삼았다”고 말했다.
3월 말 리비아 내전의 물줄기를 바꾼 곳도 시르테였다. 아즈다비야, 브레가, 라스라누프 등 동부의 석유요충지를 나흘 만에 장악하고 기세 좋게 트리폴리로 진군하던 시민군은 시르테에서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당시 시르테에서는 어린 아이들까지 총을 들고 시민군과의 결전에 대비한 것으로 전해졌다.
시르테의 군사적 중요성 역시 간과할 수 없다. 시르테에는 공군 기지는 물론 정부군의 스커드미사일이 다량 배치돼 있다. 정부군은 전세가 기울기 시작한 15일 시르테에서 개전 이후 처음으로 스커드미사일을 발사했다.
김이삭기자 hir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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